[Week&] 가을로 흐르는 한강을 걷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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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강변 나들목에서 걷기 시작해 광진교 밑에 도착했다. 일상의 피로가 시원한 강바람에 실려 날아가버린 듯 상쾌해졌다.

런던 템스 강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줄곧 한강을 생각했다.

 세계적인 도시는 대부분 강을 끼고 있지만 서울의 한강만큼 수량이 풍부하고 맑고 아름다운 강은 드물다고 한다. 템스강도 마찬가지였다. 강 양쪽으로 장엄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이어지고 세계적인 갤러리·공연장과 쉽게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고 엄청난 관광 인파로 연일 붐비고 있었지만 한강에 비하면 한참 작았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도 120년 역사를 지닌 타워브리지에 견줘 결코 뒤지지 않아 보였다.

 다만 템스강이 시민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멀리서 바라보는 강이 아니라 시민의 친근한 생활의 장이라는 점이 부러웠다. 휴식을 즐기고 열정을 나누며 삶에 활기를 더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강변을 걷는 데서 이뤄지고 있었다. 수많은 런던 시민과 관광객이 강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면서 보고 느끼고 배우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강은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기적을 떠올릴 때 한강은 저 멀리서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한강을 걸으며 즐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주택 문제와 교통 문제를 해결하고 수해를 예방하려고 한강 양쪽에 제방을 설치하면서 한강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졌다. 그야말로 자동차나 전철로 다리를 건너거나 강변도로를 달릴 때만 만날 수 있는, 그저 바라보는 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강은 서울시민에게 일상 속에서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문화의 장소가 되고 있다. 내로라하는 세계의 어느 강 못지않은 아름답고 친근한 시민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사람이 걷는 길이 닦였고, 자전거가 달리는 길이 만들어졌고, 걷는 사람만을 위한 다리도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강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은 강변을 따라 걷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템스 강가를 여유롭게 거니는 런던 시민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의 한강에도 무작정 걷기만 해도 좋은 산책로가 얼마든지 생겼으니까 말이다.

 노을 조망 명소인 강변 나들목∼낙천정 나들목 코스에 가 보니 우리 가을 꽃, 꽃범의꼬리가 활짝 피어 길을 밝히고 있었다. 강서생태공원에서는 ‘여기가 1000만 명이 넘게 산다는 서울 안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습지 생태계가 잘 복원돼 있었다. 한강을 걷다가 깨달은 사실이 또 있다. 가을이 와 있었다. 가을 문턱, 한강을 걸었다.

글=윤서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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