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노학자의 비움과 내려놓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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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27면

경남 창원시 진해구 바닷길. 풋풋한 바닷바람이 청량감으로 다가왔다. 주변 풍경 또한 신선했다. 건물과 벚나무들의 어울림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목적지인 진해 자이 아파트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몇 차례 통화 끝에 어렵게 자이 아파트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몇 십 분을 소비한 것은 아파트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에 기인했다.

삶과 믿음

그 순간 자신을 관조해 보았다. 주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옳은 말도 건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흘려 넘겼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시행착오 끝에 잘못 입력된 상태를 내려놓으니 바로 들렸다. 그 목소리는 정확하고 또렷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노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효재(88) 전 이화여대 교수였다. 그의 안내로 거실에 들어갔다. 벽면 작은 액자 속의 글귀를 발견했다.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짧은 시다. 1997년 진해로 내려와 지역사회와 아이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 교수의 하심(下心)이 읽혀진다.

그가 2003년 12월에 준공된 진해 기적의 도서관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는 운영위원장 직을 놓을 때까지 아이들과 늘 함께였다. 도서관 안내를 비롯하여 잡무를 도맡아했다. 이것은 자기의 이욕과 권세를 놓았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더 부끄러워했다.

“정년퇴임 후 서울에서 활동하다 진해에 정착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낸 것 같다.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많이 소유했다. 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겸손은 도가 무르익었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팔십 노구의 겸양은 쉽지 않다. 천진스럽게 산다는 것은 하늘마음을 의미한다. 그의 내면에서 울려나는 목소리는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생명의식을 일깨워 줬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어린이들을 위한 기적의 도서관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이 마음을 알았는지 도서관 안내를 자청했다. 아파트에서 도서관까지 차로 걸리는 시간은 5분. 호기심으로 찾은 도서관에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가는 도서관인 만큼 많은 자원 활동가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꽃으로 불리는 자원 활동가들 역시, 하심의 철학으로 어린이들을 대했다.
어린이들의 책 읽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곁으로 지도교사들과 자원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들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했다. 여기에는 그가 실천하고 있는 명상이 자리 잡고 있다.

“명상은 개인적으로 도움이 됐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었다. 빈 마음으로 지역민들을 위해 일하다 보니 이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아침저녁으로 100∼200번 되뇌는 기도 내용을 소개했다. 그의 화두가 된 셈이다. “이 시대 이 민족의 문제인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이다. 민족의 화합을 위해 미움보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확산되기를 바랄 뿐이다.”

현관을 나오면서 기적의 도서관을 살펴보는 그의 눈빛은 온화했다. 도서관 관계자들도 그가 떠날 때까지 배웅했다. 며칠이 지나 그가 보낸 한 권의 책을 받았다. 그의 부친 이약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육관응 원불교신문 편집국장. 글쓰기·사진을 통해 명상과 알아차림을 전하고 있다. 숲과 들을 접시에 담은 음식이야기, 자연 건강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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