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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자 저드슨, 거구에 비만 … 군화끈 매기 힘들어 착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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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28면

발명(Inven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찾아내다’ ‘생각해 내다’는 뜻의 라틴어 ‘inventio’다. 그러나 이는 발견(discovery)과는 다르다. 발견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발명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인류의 100대 발명품, 지퍼

리멜슨 발명센터의 체험실 ‘스파크 랩’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발명을 ‘창조적 아이디어에서 성공적 마케팅까지의 과정’으로 정의하면서 크게 7단계로 나눈다. 첫째는 생각하기. 문제나 필요성을 깨닫고 확인한다. 둘째는 탐구하기. 연구하고 궁리한다. 셋째는 스케치하기. 연구로 찾아낸 아이디어나 해결방안을 도면으로 그려 본다. 넷째는 모델 만들기. 도면을 바탕으로 실제 발명품이나 모델을 제작한다. 다섯째는 테스트하기. 발명품이나 모델을 시험해 제대로 기능을 하거나 오작동은 없는지, 문제가 해결되는지 확인한다. 여섯째는 세련되게 다듬고 미조정하기다. 디자인도 세련되게 다듬고, 기능도 정교하게 조정한다. 마지막으로 상품화다. 이때는 마케팅까지 고려해야 한다.

발명품의 역사에서 이런 과정들을 잘 보여 주는 제품 중 하나가 ‘지퍼’다. 인류의 100대 발명품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지퍼는 사람들이 입는 거의 모든 옷과 가방, 포장에 사용된다. 너무 익숙해 간단해 보이지만 발명자의 아이디어에서 요즘처럼 완전한 상품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 80년이 걸렸다.
지퍼 발명자는 미국 시카고의 엔지니어 휘트콤 저드슨(1839~1909)이다. 그는 1890년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는 군화를 주로 신었는데 체격이 크고 뚱뚱했기 때문에 몸을 굽혀 끈을 매는 게 영 불편했다. 그래서 군화 끈을 매지 않고 간단하게 신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이게 문제와 필요성을 느끼는 단계다.

궁리 끝에 그는 해결책을 찾아내 1891년 11월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미국 특허국의 특허시험관 토머스 하트 앤더슨은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유사한 특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선안을 냈고, 그는 1893년 8월 29일 ‘신발용 죔쇠 잠금 또는 해제장치’와 ‘C-curity’라고 이름을 붙인 ‘고리과 눈에 관한 장치’ 발명으로 3년 걸려 2건의 특허를 받았다. 지퍼의 오리지널 버전이다. 그의 특허 도면엔 부품도가 10개나 등장한다. 이것이 탐구하기, 스케치하기, 모델 만들기까지의 단계다.

특허의 저자 벤 아이켄슨의 분석에 따르면 저드슨 특허엔 오늘날 지퍼의 세 가지 주요 원리가 다 들어 있다. 첫째, 고리가 달린 죔쇠는 일정한 각도에서 힘을 받을 때만 맞물린다. 둘째, 죔쇠의 앞쪽 끝에 겹쳐 있거나 아래쪽으로 향한 돌출부는 고리가 풀리는 것을 방지한다. 셋째, 고리 앞부분 물림장치는 한 번의 작동으로 죔쇠를 물리거나 풀리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저드슨보다 40년 앞서 유사한 특허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재봉틀을 발명한 미국인 엘리어스 호우다. 그는 다리를 절고 직업이 없어 아내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는데, 아내 일을 편하게 해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꿈속에서 답을 찾았다. 재봉기계를 못 만들어 사형장에 끌려가는 꿈을 꾸다 자신을 찌르려는 토인의 창 끝이 반짝이는 걸 보고 바늘귀가 아니라 바늘 앞부분에 실을 꿴다는 아이디어를 얻어 재봉틀을 발명했다. 호우는 1851년 ‘자동 연속 천 마감장치’로 특허를 받았다. 지퍼의 역할을 하는 장치에 대한 특허도 포함됐다. 지퍼처럼 천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재봉틀 설계도를 도둑맞아 돈을 벌지 못했다. ‘천 물림장치’를 지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저드슨은 ‘지퍼 구두’를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출품했으나 모습이 조악해 눈길을 못 끌었다. 이가 맞물리게 엮어 주는 죔쇠도 금방 떨어져 나가고, 잠금도 금방 풀려 실용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사업을 하며 지퍼 기능을 두 번 더 개선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909년 사망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미조정의 단계가 중요함을 일러 주는 부분이다.

1913년 스웨덴 출신 미국 엔지니어 기드온 선드백이 저드슨의 문제를 해결했다. 제품명은 ‘플라코 패스너’였다. 그러나 초기엔 대부분 부츠나 담배 케이스에 사용됐다. 그러다가 1912년 쿤 모스라는 재단사가 양복 주머니에 지퍼를 활용하면서 옷에 본격 사용됐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미군의 비행복과 지갑벨트에 사용됐다.

‘지퍼’라는 이름은 세계적인 고무제품회사 굿리치가 1920년대 고무장화와 고무덧신에 사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25년 굿리치는 지퍼를 올릴 때 나는 소리가 ‘지퍼-업(Zip-er Up)’처럼 들린다고 ‘지퍼 부츠’라는 장화 상표 등록을 출원했다. 그러나 상표권은 ‘지퍼 부츠’로만 한정되고 ‘지퍼’라는 이름은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됐다. 최초로 재봉틀을 발명한 호우나 지퍼를 발명한 저드슨은 좋은 제품을 발명하고도 사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발명의 결과로 결국 인류의 삶에 편함이 제공됐다. 한 번에 완벽한 발명이 아니더라도 계속 장려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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