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유통업체가 자초한 ‘대규모 소매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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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지철호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국장

대형 유통업체들의 불공정행위(不公正行爲)를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소매업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자 대형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일부 학자 등이 반대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주위에서 영업하던 여러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들이 사라져도 이를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를 현재 영업하는 소수의 거대 유통업체가 다시 채워 줬기 때문이다. <본지>8월25일자 E8면>

 유통분야 독과점(獨寡占)이 심화되면서 대형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불공정행위가 잦아졌다. 여러 유통업체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어떤 업체가 불공정행위를 한다고 해도 다른 유통업체에 납품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납품수수료가 무턱대고 올라가지도 않을 테고 너무 올라가면 다른 거래처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3대 백화점, 3대 대형마트, 5개 TV홈쇼핑과 거래하지 못하면 영업을 사실상 중단해야 한다. 거대 유통업체들이 불공정행위를 해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30~40% 수준의 수수료(手數料)를 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납품을 중단해야 한다. 대규모 소매업법 제정을 반대하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유통업체와 납품업체가 계약에 따라 거래하는데 이를 정부가 나서서 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사적 자치를 내세우는 형식논리일 뿐이다. 일례로 대형 유통업체들은 통상 여름철 성수기(盛需期)를 앞두고 바캉스 용품을 대량 발주하는데 올해같이 장마가 계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많은 경우에 일부만 납품받고 나머지는 납품을 받지 않아 그 손해를 고스란히 납품업체에 떠넘기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사적 자치 운운하는 건 억지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계약이 이루어진 이후에 힘의 우위에 있는 일방 당사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않은 탓이기 때문이다. 계약 성립까지의 문제도 아니고 그 이후의 불이행 문제까지 정부에서 개입하지 말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둘째는 유통업체가 싸게 구입해야 소비자에게 싸게 판매할 수 있는데, 새 법률은 이 행위를 불공정행위로 규제한다는 것이다. 중소 납품업체 보호에 치중하다 보니 소비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없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쟁은 가격을 낮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소비자가 많이 이용하는 대형마트나 백화점 모두 상위 3개사의 시장점유율이 80%를 넘는 독과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통업체들이 싸게 구입했다고 이를 소비자에게 싸게 팔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독과점 기업을 포함한 모든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건 경제학의 기본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상황에서 싸게 파는 유통업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대규모 소매업법(小賣業法)’ 제정이 행정 편의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주의적인 입법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동안 공정위 고시로 규제하던 내용을 최근의 동반성장 분위기에 편승해 새로운 입법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유통산업의 독과점 현실을 무시하면서 사적 자치나 소비자 이익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중소 납품업체들에 각종 불공정행위를 계속하면서 독과점 지위를 유지하려는 속셈에 불과하다.

지철호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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