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옐홈 '누가 월드컵을 훔쳤나?'

중앙일보

입력

월드컵을 과연 개최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준비에 한창이지만 1995년만 해도 개최권 획득 여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개최가 좌절될 것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회장이었던 후안 아밸란제(84)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할 수 없을 것" 이라는 발표하기까지 했다.

세계 인구의 5배가 넘는 3백10억명이 지켜보고(94년 미국 월드컵), 유엔 가입국보다 많은 1백98개의 회원국을 가진 축구왕국 FIFA 권좌에 앉아있던 아밸란제는 왜 한국 개최를 그토록 반대했을까. 아니 왜 그렇게 일본을 밀었을까.

사건취재 작가 데이빗 옐롬이 쓴 '누가 월드컵을 훔쳤나?' (이창식 옮김.시빌구.9천5백원)에 답이 있다.

국가간의 복잡한 이해구조, FIFA 내부의 권력관계 등 많은 요소가 있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은 역시 돈이다.

82년 이후 월드컵 등 여러 스포츠 행사에 대한 마케팅과 중계권을 독점적으로 대행하고 있는 아밸란제의 돈줄인 국제스포츠레저(ILS)지분 49%를 일본 광고기업 덴츠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가정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누가 월드컵을…' 은 2002년 월드컵 개최 비화를 담은 책은 아니다.

1974년 회장직에 올라 98년 물러날 때까지 24년동안 월드컵의 개념을 '축구잔치' 에서 '하나의 상품' 으로 바꾸어버린 '태양왕' 아밸란제에 관한 것이다.

그의 유년시절을 비롯해 그의 재임기간의 사건들, 뒷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아밸란제 전기인 셈이다. 하지만 위인전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증언을 곧바로 수치나 정황, 다른 사람의 증언으로 뒤집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지난 8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 등 훈장만 3백개 이상 받은 체육계 실력자를 이렇게 '깎아내리는' 이유는 FIFA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정몽준이 값진 승리를 이끌어낸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 예는 아밸란제가 행한 폭정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아밸란제가 FIFA에 들어가기도 전인 71년부터 회장직을 향해 뛰며 FIFA사상 처음 금권선거를 도입한 인물로 꼽는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아밸란제는 수영선수로 운동세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36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힐만큼 그는 꽤 유능한 선수였다. 52년.56년에는 수구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권력을 안긴 것은 축구와의 만남이었다.

브라질 스포츠 연맹 회장이 된 58년 브라질 팀은 미래의 축구영웅 펠레를 대표로 선발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었지만 아밸란제는 펠레가 있어야 브라질이 '줄 리메 컵' 을 가질 수 있다며 그를 합류시켰다. 그리고 펠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사이가 벌어졌지만 이런 인연으로 아밸란제는 펠레를 선거에 이용했다.

10표뿐인 남미 지지로는 안정권 60표를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71년 선거전에 뛰어들자마자 펠레와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아프리카 국가의 본선 진출권 확대' 와 '남아프리카 고립' 같은 공약도 있지만 펠레의 덕에다 항공권 등 독일 프랑크푸르트 FIFA총회 경비 일체를 제공하는 전략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선거 재원 조달을 위해 횡령 등으로 그가 브라질 스포츠연맹에 끼친 손실은 1천만 달러가 넘었지만 FIFA회장에 당선되자 국가적 망신을 우려해 브라질은 그를 기소하지 못했다.

선거 전만해도 스포츠계의 큰손인 아디다스사의 다슬러 회장은 경쟁자인 전임 스탠리 로즈 경 지지였다.

하지만 뜻밖의 결과가 나오자 바로 '갈아타기' 전술을 보여준다.

세계 각국의 축구연맹과 아디다스 독점 사용 계약을 원한 다슬러는 그를 구워삶아 그의 뜻대로 일을 해치웠다.

약속시간에 늦은 모로코 왕에게 모욕을 주는 등 아밸란제의 오만한 성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이외에도 이 책엔 개최지 선정이나 심지어 대진표 조작, 스폰서와의 관계 등 추악한 축구세계의 이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