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열정으로 뭉친 다섯, 사랑과 감동 전파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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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지역 30~50대 주부 다섯 명으로 구성된 밴드 ‘에버그린’(늘 푸르고 젊게 살자는 의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아내와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실용음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3년간 쏟아 부은 열정 덕분에 이제는 지역 행사 무대의 단골 밴드가 됐다. 화려한 공연은 아니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아주머니들이다.

아내와 엄마로 자신의 이름을 잊고 지냈던 주부들이 음악으로 또 다른 행복을 찾았다. 생동감 넘치는 공연, 당당한 이들의 모습에 반한 가족도 든든한 지원자가 됐다. [사진=조영회 기자]

아주머니들의 ‘반란’

지난 12일 오후 8시30분 충남 천안시 원성동에 있는 에버그린 밴드부 연습실 앞.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곳이었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힘찬 연주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에버그린은 베이스기타 최미희(51)씨, 기타 이남주(36)씨, 보컬 김응미(41)씨, 키보드 노영란(51)씨, 드럼 이영미(49)씨 등 5명으로 결성된 아마추어 밴드다. 낮에는 주부, 직장인, 미술학원과 댄스스포츠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밤엔 연습실에 모여 공연을 준비한다. 저마다 사는 곳과 직업은 다르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하나의 관심사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멤버 중 그 누구도 자신이 밴드 활동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일과 가정에 충실하면서 개인적으로 취미활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그런 이들이 ‘주부라고 살림만 하란 법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에 나선 건 2008년. 현재 팀 리더인 최미희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11년 전 기타를 배우는 남편의 권유로 음악학원에서 베이스기타를 접했어요. 당시 천안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는 여성은 거의 없다는 학원 강사와 남편의 말에 ‘그럼 밴드를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을 했죠. 이후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영미씨와 함께 멤버를 모았고 자연스럽게 에버그린을 만들게 됐어요.”

 하지만 주부들이 밴드 연습을 위해 매주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첫 멤버 중 몇 명은 1년도 안 돼 활동을 포기했다. 밴드가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도 미희씨와 영란씨는 ‘여기서 멈추기엔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멤버를 모집했다. 현재는 5명 멤버 모두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참가하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멤버가 바뀌면서 팀 색깔도 조금씩 변했다. 예전에는 트롯 위주로 공연을 했지만 지금은 최신가요까지 거뜬히(?) 선보일 수 있는 실력이 됐다. 신입 멤버이며 팀 막내인 이남주씨는 “직장에서 쌓인 피로를 이곳에서 푼다”며 “나에게 있어 밴드 활동은 삶의 활력소”라고 만족해 했다.

음악으로 가정 평화도

이들은 “밴드 활동을 하면서 오히려 가족과 함께할 일도 많아지고 대화도 더 자주 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늘 크고 작은 공연을 끝난 뒤 부부동반으로 단합 여행을 간다. 리더 최씨는 “멤버들이 모두 술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공연 뒤풀이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우리를 지원해준 남편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영미씨는 “이제는 우리보다 남편들이 서로 친해져서 만나기만 하면 수다를 떤다. 예전에는 그렇게 반대를 하더니 이젠 우리의 열렬한 팬”이라며 웃었다.

사실 이씨의 경우 밴드의 일원으로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씨는 7년 전 평소 다니던 교회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며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통기타를 더 깊이 배워보고 싶어 실용음악 학원도 다녔다. 그런데 학원에서 드럼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멋진 여성 드러머의 모습을 떠올리니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부터 이씨는 드럼 연주에 매달렸다. 그리고 교회와 친구들과 결성한 밴드를 오가며 열심히 활동했다. 하지만 이씨가 드럼에 푹 빠진 사실을 안 아버지와 남편이 심하게 반대했다. “주부가 밥만 잘하면 됐지 무슨 드럼이냐”며 핀잔을 줬다.

그러다 2008년 12월 31일 대천의 한 아파트 야외무대에서 열린 에버그린의 첫 공연을 보고 아버지와 남편은 이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2009년을 여는 첫눈을 맞으며 열정적인 공연을 펼친 에버그린의 첫 무대는 이씨의 아버지와 남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씨는 “지금은 아버지와 남편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다. 음악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가족’이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남주씨의 기타 연주 모습. [사진=조영회 기자]


직업은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

에버그린은 지난 3년 동안 주말 공연을 수십 차례 했다. 자신들을 불러주는 무대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자비를 들여 위문·봉사 공연을 다녔고, 동네나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청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고 무대에 섰다. 인터넷카페에 생동감 넘치는 공연 현장 분위기를 담은 사진과 영상을 올려 가족과 함께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에버그린은 또 하나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주부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카페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인연을 맺고, 그들이 음악을 향한 꿈을 꺾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하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에버그린 2기 멤버 5명을 모집하고 있다.

 “실력은 상관없어요. 우리와 함께 평생 노래할 분이라면 누구든 환영이에요. 우리 목표가 ‘실버밴드’거든요. 이대로 계속 10주년, 20주년을 맞이해가며 할머니가 돼서도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나요?”

▶문의=최미희 010-2967-3881 (http://cafe.daum.net/missyevergreen/)

글=조영민 기자·조한대 인턴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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