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옥쇄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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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결승 3국>
○·허영호 8단 ●·구리 9단

제11보(109~125)=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허영호 8단은 초반전 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멍한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돌이 이상하게 움직였고 갈팡질팡했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눈앞에 세계대회 우승컵이 보인 탓이었다. 이제 그 우승컵은 아주 멀리 산 너머로 사라졌고 그러자 허영호의 몸과 마음은 ‘자유’를 되찾았다. 이제 수들은 날카롭게 움직이고 행마는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승부란 이상하다. 허영호는 왜 처음부터 이렇게 둘 수 없었던 걸까.

 하변 흑 대마에 맹공을 퍼붓고 있지만 한발 늦은 탓에 잘 먹히지 않는다. 구리 9단은 편안하게 타개에 나서 119까지 삶을 거의 확보했다. 백이 대마를 포위해도 흑은 중앙 A에 한 집, 그리고 B에 두면 또 한 집이 있다. 허영호의 시선은 이제 상변으로 향하더니 거의 노타임으로 120 뻗는다. 진작부터 예고되었던 수순. 흑이 123으로 뚫었을 때 허영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미련을 갖는 것은 헛된 일,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124로 막아버렸고 구리는 지체 없이 125 끊었다.

 ‘참고도’ 백1부터 죽죽 뻗으면 삶은 크게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어차피 진다. 승부를 보려면 막아야 한다. 옥쇄의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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