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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iz] 크리스토프 블레시 “e 북은 종이책을 대체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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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에서 만난 크리스토프 블레시(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학 도서학과) 교수. 벽면에 장식돼 있는 것은 훈민정음 판본이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책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 손에는 책 대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쥐어져 있다. e-메일이 보편화되면서 개인들 간의 종이 우편물은 사실상 사라졌다. 책도 이런 전철을 밟게 될까. 독일은 출판 강국이다. 서구에 최초로 금속활자를 선보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7년)의 나라다. 독일 마인츠에 그의 이름을 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도서학으로 유명하다. 도서학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연구기관이다. 이 대학에서 전자출판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크리스토프 블레시(Christoph Blsi·51) 교수가 출판유통진흥원(회장 김종수) 주최의 국제 세미나 참석차 최근 방한했다. 그는 “전자책이 보편화되겠지만, 종이책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블레시 교수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에서 만났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블레시 교수는 “건물 전체를 디지털도서관으로 꾸민 경우는 처음 본다. 매우 인상적인 건물”이라고 말했다.

●책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하다. 현재 전자책은 책을 파일로 옮겨놓은 수준인데.

 “변화의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다. 1930년대에는 무성 영화가 영화의 대세였다. 그게 현재의 영화로 바뀌었다. 이런 유의 변화를 전자책에서도 목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대인들은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소리를 선호한다. 텍스트 위주의 전자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자책 시장에서도 동영상·이미지·음악이 포함된, 진전된(enhanced) 형태의 전자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진전된 형태의 전자책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 위주의 전자책이 가격 경쟁력을 갖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중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말 몰입해서 보고 싶다면, 텍스트가 훨씬 효과적이다. 텍스트에 영상과 소리가 섞이면 독자의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우리 두뇌의 정보처리 절차를 분석해 보면 텍스트만을 볼 때 더욱 집중하게 되고, 대상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한다.”

●독일 출판시장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도나도 전자책에 대해 말하지만 시장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출판업계에서 전자책의 시장점유율은 0.5%밖에 안 된다. 2015년에도 10% 정도일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전자책의 보급이 빠르다. 하지만 미국에서 전자책의 시장점유율도 10%에 못 미친다. 나는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과 미국에서 전자책 점유율의 차이가 크게 나는 이유는 뭔가.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독일은 인구당 서점이 미국보다 훨씬 많다. 미국의 로키산맥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점에 가기 위해 100㎞를 운전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자책 구입이 훨씬 편하지 않겠나. 둘째, 독일은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자책과 종이책의 가격이 동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독일에선 전자책은 종이책과 가격 차이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미국은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훨씬 저렴하다. 셋째, 미국은 기술지향적 사회이다 보니 전자책 전용 단말기,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가 유럽보다 더 많이 보급돼 있다.”

●전자책과 종이책 값이 독일에선 같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그럴 것이다. 전자책과 종이책 가격이 동일한 것은 ‘독일출판서점연합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독일출판서점연합회는 조직력이 강하고 독일 사회에서 정치력도 강한 조직이다. 연합회는 저작권 침해를 우려해 전자책의 확산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이다. 어떤 전자책이 독일에서 출판된 바로 다음날에 우크라이나·러시아에서 이 책을 무료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상상해 봐라. 누가 전자책을 생산하고 사려 하겠나.”

●출판업 차원에선 전자책에서 이윤을 더 많이 낼 수 있을 텐데.

 “독일출판서점연합회가 전자책 가격을 비싸게 유지하는 이유가 있다. 종이책에 붙는 부가가치세는 최근 7%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전자책에는 여전히 19%의 부가세가 붙는다. 같은 가격이라도 세금을 제하고 나면 출판사로선 전자책의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다.”

●출판서점연합회의 입지가 매우 강한 것 같다. 정부는 개입을 안 하나.

 “출판산업에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독일 사회에서 출판서점연합회는 문화정치적으로 파워가 강하다. 일찍이 1825년에 생겨났다. 그래서 아직까지 도서정가제를 충실히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종이책과 비교해 전자책의 강점은 무엇인가.

 “전자책은 새로운 독자층(audience)을 만들 수 있다. 15~25세의 젊은층은 스마트폰을 쓰지만, 종이책을 잘 읽지 않는다. 이들이 스마트폰상에서 전자책을 읽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또 하나, 종이책보다 검색이 편하다는 것이 전자책의 강점이다. 독자가 전자책의 검색 기능을 활용하다 음악이나 다른 형태의 예술에 노출되게 하는 비즈니스도 가능하다. 또 전자책의 경우 책을 읽다 맘에 드는 구절이 나왔을 때 바로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려 지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자책의 강점은 무엇보다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종이책만큼 인쇄·수송 비용이 들지 않으니까.”

●그럼 전자책의 약점은.

 “종이책보다는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단점이 있다. 어떤 전자책을 구입했을 때 그것을 10년 뒤에 다시 읽는 게 가능할지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기기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소프트웨어도 달라질 테니까.”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 독서 행태의 차이가 있나.

 “대체로 보면 독서광들은 주말에 걸쳐 종이책으로 긴 텍스트를 읽는 경향이 있다. 한편 출퇴근 시간에는 짧은 텍스트를 전자기기로 읽는다.”

●종이책에는 감성적인 측면이 있다.

 “맞다. 독일에선 전체 책 중 50%가 선물용으로 팔린다. 책은 독일에서 매우 중요한 선물이다. 전자책을 내려받을 수 있는 암호를 선물로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책을 주고 받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럽에선 거실에 책을 진열해 놓고 자기가 어떤 책을 읽는지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문화다. 전자책은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계속해 종이책을 찾을 것으로 보나.

 “그렇다. 가시적인 미래에는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진 못할 것이다. 종이책을 본 사람에겐 ‘어떤 내용을 책의 앞 부분에서 봤다’ ‘왼쪽 페이지에서 봤다’ 이런 기억들이 오래도록 남는다. 전자책은 이런 기억을 제공하기 어렵다.”

●독서광들은 전자책을 기피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재미 있는 현상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광들이 전자책을 기피할 것이란 짐작은 틀린 것이다. 교육을 많이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책을 많이 읽고 동시에 디지털 미디어를 많이 활용한다. 나 역시 TV를 본다. 하루 서너 시간은 아니지만….”(웃음)

●전자책이 보편화되면서 출판산업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그렇다.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출판 채널이 다양해진다. 이미 구글· 애플, 그리고 대형 통신사들이 전자책 서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우면서 강력한 행위자들이다. 이들은 음악·영화를 디지털화한 경험이 풍부하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출판업자들은 힘겨워질 것이다. 이들의 출현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도 크다. 구글·애플 같은 초다국적 대형 회사들이 출판시장을 독점한다면 책의 다양성이 줄어들 것이다. 그들은 베스트셀러 위주의 책을 내고 소규모 독자, 소규모 그룹을 위한 책에 대한 관심을 별로 안 가질 것이다. 독일에선 매년 새 책이 10만 권씩 나온다. 그러나 독일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미국은 독일보다 약간 많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소규모 그룹을 위한 책이 미국에선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는 것이다.”

●전자책이 더욱 보급되면 소규모 서점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나.

 “서점에 종이책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야 즉석에서 책을 자유롭게 들춰볼 수 있으니까. 종이책을 들춰보다가 ‘나는 이 책을 전자책으로 구매하고 싶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 서점에는 전자책을 내려받을 수 있는 코너가 생길 것이다. 아니면 서점에서 전자책을 내려받을 수 있는 액세스 코드를 사서 집에서 다운로드받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책이 주는 촉감·후각 이런 것을 전자책은 만족시키진 못한다. 이런 것 때문에라도 종이책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동네의 소규모 서점이 줄어들고 있다. 온라인으로 책을 사면 소규모 서점에서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다.

 “그것은 서점에 매우 치명적이다. 독일은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책값이 같다. 아마존도 독일에선 도서정가제를 준수해야 한다. 배송비만 무료로 해줄 수 있는 정도다. 독일의 도서판매업자들 중에서도 온라인상으로 책을 싸게 팔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유혹을 실천에 옮기면 바로 다음날 곤란을 겪게 된다. 아무튼 도서정가제 덕분에 독일에선 매년 출판되는 신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독일은 출판강국으로 유명하다. 비결이 뭔가.

 “구텐베르크가 태어난 나라 아닌가. 하하하. 그리고 19세기 초기에 힘을 모아서 출판산업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19세기 후반에 도서정가제를 도입했다.”

 그러면서도 블레시 교수는 ‘독서의 양극화’를 경계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만 책을 읽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책을 읽지 않는 현상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커지고 있다. 독일인 평균으로 보면 매년 독서량이 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독서를 하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A reader is a leader)’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출판산업과 독서문화가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전자책 시장은 ‘폭풍전야’

출판사·작가·온라인서점…기존 유통구조 탈피 시장 선점 경쟁 뜨거워

책은 인류사에서 뿌리 깊은 미디어다. 역사로 볼 때 영화·음반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책의 디지털화는 영화·음악 등에 비하면 거북이 걸음이었다. 미국 온라인서점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출시한 게 4년 전인 2007년이니까.

 이렇다 보니 전자책 소비에는 장벽이 많다. 전자책 소비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전자책 전용 단말기를 통해서다. 킨들 외에 소니가 출시한 ‘리더’ 등 몇 가지 단말기가 나와 있다. 전용 단말기는 기기별로 세상이 분리돼 있다. 소비자가 아마존에서 구입한 전자책을, 킨들 외에 다른 전자책 단말기나 스마트폰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전용 단말기는 아직까진 동영상이나 컬러를 구현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다기능 단말기를 통해서다. 다기능 단말기인 만큼 동영상과 음향 등이 포함된 전자책도 구현하고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블레시 교수는 이런 유의 전자책을 ‘진전된(enhanced) 전자책’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텍스트가 서술 구조의 기본인 경우에만 전자책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텍스트·영상이 뒤섞이다 보면 전자책의 경계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는 텍스트 위주의 전자책이 압도적이다. “디지털 작업을 훨씬 쉽고 저렴하게 할 수 있으며, 동영상·음악·이미지 등의 저작권 협의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자책 출판의 기상도는 ‘폭풍전야’다. 스마트폰·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의 보편화와 맞물리면서다. 단말기 하드웨어 회사는 물론이고 통신사, 출판사, 대형 서점, 온라인 쇼핑몰·작가 등 다양한 주체들 간에 합종연횡과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 기존의 종이책 생산·유통 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종이책 시장은 ‘작가→출판사→인쇄업자→도매 유통상→소매 서점’의 생산·유통 구조가 나라별로 정립돼 있었다. 일견 복잡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영역 간 경계와 역할 분담이 뚜렷했다. 출판산업 관계자들은 서로 협력적이었고, 갈등이 적었다. 출판은 산업이기보다는 문화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전자책 시장에선 독자·작가·출판사·판매대리인 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작가 스스로 출판사가 되고, 하드웨어 회사나 통신사가 대형 서점의 자리를 넘본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대표적인 예다. 그녀는 최근 포터모어라는 홈페이지를 열었다. 해리포터 전자책을 이 사이트를 통해서만 판매할 계획이다. 저자 스스로 전자책 출판·판매를 겸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존은 아이폰·아이패드상의 ‘킨들’ 애플리케이션에서 판매된 전자책 수입 중 30%를 애플에 제공하기로 최근 애플과 합의했다. 전자책 시장에서 애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은 격이다.

 페이스북도 이달 초 전자책 시장에 뛰어들었다. 전자책 출판사인 푸시팝(Push Pop) 인수를 발표하면서다. 6억 명을 넘어선 페이스북 이용자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전자책 출판, 판매에 나설 것으로 업계는 추측하고 있다. 이래저래 전자책 시장은 현재로선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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