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못춘 바다·훈민정음 … ‘NIH신드롬’에 갇힌 소프트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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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개발을 맡는 무선사업부는 요즘 초긴장 상태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로 삼성의 소프트웨어(SW) 역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자체 운영체제(OS) ‘바다(bada)’를 탑재한 스마트폰 ‘웨이브3’ 공개가 임박한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다음 달 2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릴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IFA2011)에서 처음 선보일 예정”이라고 18일 밝혔다. ‘심판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OS는 ‘SW의 꽃’으로 불린다. 회사가 가진 SW 역량의 집결체다. 삼성은 그간 구글 안드로이드OS에 기반한 스마트폰을 주로 만들면서도 독자 OS 바다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바다 탑재폰인 웨이브3의 완성도는 삼성의 미래를 재는 가늠자 중 하나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장인 신종균 사장이 17일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산업계의 큰 변화다. 바다를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제껏 바다가 거둔 성과는 미미하다. 올 2분기 세계시장 점유율은 1.9%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성이 세계 휴대전화 시장 2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구글의 공유·개방형 OS인 안드로이드 덕이었다. 하지만 이젠 구글이 모토로라에만 독점 공급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삼성 고위직 엔지니어 출신 A씨는 “과거 삼성은 노키아OS 심비안 개발에 참여했었다. 하지만 노키아가 레퍼런스폰(새 버전 출시 때마다 가장 먼저 탑재해 시장에 내놓는 휴대전화)을 독점하는 바람에 별 수익을 거두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밖에선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삼성은 이미 2000년 초 바다OS 개발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큰 빛을 못 보고 있는 건 개발 역량 부족보다는 전략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잘나가는 SW 기업의 특징은 ‘오픈(open)’과 협업, 벤처정신이다. 하지만 삼성은 제조업에서 출발한 거대 기업답게 독자 개발을 선호하는 폐쇄적 문화와 투자 대비 확실한 실적을 요구하는 성과주의가 강하다는 평가다. 이 같은 성향을 IT업계에선 NIH 신드롬이라 부른다. 삼성이 이에 제대로 대처 못한 흔적은 과거 SW 개발 사례에서도 여럿 찾을 수 있다.

 삼성은 1992년 아래아한글에 맞설 워드프로그램으로 ‘훈민정음’을 내놨다.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결과는 민망했다. 지금 훈민정음은 ‘삼성 전용 프로그램’이 됐다.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대표적 SW로 휴대전화의 자판입력 기술인 ‘천지인’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삼성 직원이던 개발자와 특허권 분쟁이 일면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이런 만큼 삼성의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열린 SW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IT업계의 진단이다. 문규학 소프트뱅크코리아 사장은 “SW산업은 도박과 같다. 미래 가치에 베팅해야 한다. 애플이나 구글이 매출 1000억원짜리 회사를 그 몇 배의 돈을 주고 인수합병(M&A)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A씨 또한 “지금의 어려움을 내부 역량만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S급 인재 1000명보다 세계를 향한 열린 SW생태계 구축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나리·심재우 기자

◆NIH신드롬=직접 개발하지 않은 기술이나 연구성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뜻한다. ‘Not Invented Here’의 머리글자를 땄다.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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