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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⑩·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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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울겠어요, 당신에게 위로가 된다면

시 - 허수경 ‘나는 춤추는 중’외 8편

고고학 박사이기도 한 허수경 시인은 “고고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시 때문이었다”고 했다. “시인이라는 업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시간까지 삶을 끌고 온 것 같다”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문학동네 제공]

‘어느 주점에서 벌겋게 취한 태양은 우는데/모든 별들에게 버려진 태양은 우는데….’(‘박하의 나날’)

 이런 시는 울고 있다. 절망적인 세계에서 절절하게 절망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자리는 절망의 한 가운데다. 절망의 현장에서 가장 큰 소리로 울어버릴 때, 시적 울림도 깊어진다.

 허수경(47)의 시편은 울음의 미학 위에 견고하다. 그가 고고학을 공부하겠노라 독일로 떠난 게 19년 전이다. 모국어로부터 뚝 떨어져 살아온 탓에 울음의 농도가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울음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다. 문학의 본업이 절망과 울음에 있다고 믿는다.

 “문학이 어떤 절망의 현장을 포착해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죠. 절망의 순간을 읽는 독자에게 그것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희망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저는 속수무책입니다. 희망이란 말 뒤에 숨겨져 있는 위선이 저는 무섭습니다.”

 시인은 2006년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고학 공부를 끝낸 뒤 줄곧 문학의 자리로 되돌아오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는 올 여름에도 발굴 현장에 있었다. 인터뷰를 청했을 때 “발굴하러 터키로 떠날 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e-메일로 답변을 보내왔다.

 “고고학 작업은 이미 시작한 것을 마무리하는 겁니다. 먼 길을 에둘러 드디어 문학으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의 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곳곳에 고고학적 사유가 웅크리고 있다. 시에서 시간을 다루는 솜씨가 딱 그렇다. 이를테면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는 꿈’이란 시에서 소녀와 노인의 시간은 엉켜있다. 소녀는 노인이 사는 곳을 일러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라고 증언하고, 노인은 소녀를 일러 ‘그 아이가 땅으로 들어간 건 아주 오래 전 일’이라고 일러준다. 시적 화자는 혼돈스럽다. 그래서 이렇듯 절망의 노래를 부른다.

 ‘누가 우는지 밤은 길고도 습했고 깨어나니/방에도 포도넝쿨이 들어차서 나갈 수가 없었다.’

 “발굴을 하다 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층이 눈 앞에 드러납니다. 어제처럼 생생하게요. 수천 년의 시간과 마주하다 보면 시간 개념이 들쑥날쑥 해집니다. 다른 나이, 다른 시간대 등이 얽히고설키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지요.”

 온갖 매체들이 부질없는 희망을 외칠 때, 어떤 시인은 마지막까지 울기를 멈추지 않는다. 허수경 시인은 잘 울고 잘 절망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 ‘사랑의 그림자를 쫓기 위해 당신을 방문한 후기’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바타유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인의 목소리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쓴다, 마치 우는 아이처럼’

◆허수경=1964년 경남 진주 출생. 독일 뮌스터대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혼자 가는 먼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 등.

나는 춤추는 중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는 춤 추는 중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 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 당한 것처럼

나는 춤추는 중

유통기한 없는 고통, 벗어날 수 있을까요

소설 - 한강 ‘회복하는 인간’

한강씨는 “소설가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의 삶의 언어로 인간과 삶에 대해 질문하는 게 소설가의 일”이라고 했다. [조제경 인턴기자(조선대 법학과)]

조심스레 물었다. “인간의 고통에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작가는 머뭇거렸다. “음…. 어떤 고통은 유통기한이 없지 않을까요?”

 후보작 ‘회복하는 인간’을 두고 소설가 한강(41)씨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묻는 이는 “고통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므로 유통기한이 있다”고 주장했고, 답하는 작가는 “고통의 소멸이 회복이라면, 원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완전한 회복(回復)이란 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되물었다.

 논쟁은 잠시 거두고 작품으로 곧장 들어가기로 했다. 소설의 이야기는 비교적 또렷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표제에서 직접 드러난다. ‘회복하는 인간’의 문제다.

 주인공은 서른을 훌쩍 넘긴 방송 작가다. 일주일 전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장지(葬地)에서 그만 발목을 삐끗했다. 다친 부위에 뜸을 뜨다 화상을 입었다. 상처가 깊어져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자연 회복될 수 있으니 두고 보자”고 한다.

 주인공의 발목 상처가 아무는 동안 그의 마음의 상처 또한 드러난다. 언니와 그는 오랫동안 소원한 사이로 지냈다. 심지어 생사를 오가는 언니를 거의 만난 적이 없다. 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음의 고통이 몰아친다. 복숭아뼈 아래 화상이 전해오는 육체의 고통과 더불어. 주인공은 끝내 고통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을까.

 “주인공이 고통으로부터 회복된다면 다행이지만, 또 한편으론 무정한 일이기도 하죠. 회복되지 못한 언니가 떠난 뒤 저 홀로 회복되는 거니까. 그러면서도 회복이란 인간이 가진 생명의 힘이기도 하잖아요.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회복돼야 하는…. 이처럼 회복하는 인간을 둘러싼 복잡한 양상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친 발목에 뜸을 뜨다 화상을 입은 이야기는 작가의 실제 경험이다. 그 경험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발목이 나아가는 걸 보면서 인간은 죽지 않으면 회복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시점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을 ‘당신’이라 지칭하며 현재 시점(발목의 고통)과 과거 시점(언니와의 불화), 그리고 미래 시점(발목의 회복)을 오가며 이야기를 끌고간다. 그러니까 현재 시점의 주인공은 미래에 자신의 고통이 회복되리라는 걸 모른 채 일종의 죄의식마저 느끼고 있지만, 독자들은 화자의 미래 증언 덕분에 주인공의 고통이 끝내 회복되리라는 걸 안다. 한씨는 “어긋나는 시점 때문에 회복과 관련한 여러 겹의 사유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가 풀어놓는 미래 증언 어디에도 주인공의 마음의 상처가 회복될 거란 서술은 없다. 육체의 고통은 분명 회복되리라 예고하지만 마음의 고통에 대해선 유보적이다. 작가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 자신에게 최대한 진실해지는 순간, 혹시 회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어보는 데서 그쳐야 한다. 그게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가 옳았다. 어떤 고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회복의 시점 또한 정해진 게 없다. 다만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해 진실해질 것. 그 진실의 순간에 회복의 가능성이 솟아날지도 모르니까. 고통을 통과한 인간만이 ‘회복하는 인간’에 이를 수 있다.

 ◆한강=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여수의 사랑』, 장편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등. 한국소설문학상·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이상문학상 등 수상.

글=정강현 기자
사진=조제경 인턴기자(조선대 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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