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지나도 8·15 돌아오면 수술받던 육 여사 생각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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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비례대표 이애주(65·사진) 의원은 간호사 출신이다. 그의 간호 경험은 남다르다. 1969년부터 35년간 서울대 병원 간호사로 일했는데 대부분의 기간 동안 VIP 병실 책임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파독(派獨) 간호사를 꿈꾸던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징그러운 가난을 떨쳐 버리기 위해 돈 많이 벌 수 있는 풍요의 나라를 떠올렸다. 하지만 꿈과 달리 특별한 환자들의 곁을 지키는 게 그의 임무였다. 74년 초 VIP 병실인 특실(301호) 담당 수간호사가 된 뒤 그는 이승만·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 모든 대통령을 서울대 병원에서 만났다.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찾는 곳이 병원이다. 개인의 일생으로 보면 병원 생활은 지치고 힘든 시간이다. VIP라고 병고(病苦)가 일반 서민과 다를 리 없다. 병상의 VIP들은 불쑥 찾아든 병고에 어떻게 맞섰을까. 그는 그런 VIP들에게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 의원에게 오랜 병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었다. 37년 전인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꼽았다.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글쎄…”라며 육 여사의 베치코트 얘기를 먼저 꺼냈다. 한복 치마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종의 속치마가 베치코트다. 통상 한복을 맞출 때 한꺼번에 만든다. 하지만 육 여사는 단을 덧대 3단으로 재활용한 베치코트를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었다. 듬성듬성 꿰맨 손바느질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는 것이다.

간호사 이애주는 육 여사가 저격된 날, 그의 곁에 있었다. 수술 현장을 지키다 육 여사를 회복실로 옮기고 유품을 챙겼다.

육 여사는 그날 오전 10시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저격범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았다. 원남동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게 9분 만인 10시32분. 응급 조치와 뇌 수술을 위해 머리카락을 깎는 데 20여 분이 걸렸다. 광복절 휴일이었지만 집에서 TV를 지켜 보던 의료진이 속속 병원으로 뛰어나왔다. 11시쯤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가 메스를 들어 시작된 수술이 오후 4시20분까지 5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 의원이 서울대병원 VIP 병실의 풍경을 회고했다.
 
집도의 총탄 5만 비켜 갔으면
-육 여사 수술은 어떻게 진행됐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똑바로 나간 게 아니라 뇌 속에서 돌았다. 그 과정에서 오른쪽 뇌의 가장 큰 정맥 혈관을 건드렸다. 저격 30분 만에 수술이 시작됐지만 머리 속에 피가 차 있어 수술을 시작하자마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문제는 육 여사 혈액형이 AB형이어서 수혈용 피가 귀했다. 인근 병원들과 적십자혈액원의 피를 다 가져왔지만 모자랐다. 당시엔 피를 병에 보관했다. 400cc로 148병의 피가 수혈됐다.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기관지 절제 수술도 했다.”

-왜 그렇게 어려운 수술이 됐을까.
“총탄이 뇌의 가장 큰 혈관을 크게 손상시켰다. 집도의는 5시간 넘는 수술 끝에 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내게 환자용 새 시트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제 돌아가시는구나’란 생각에 울컥하고 먹먹했다. 눈물을 흘리며 몸을 감쌀 큰 시트와 새 환자복을 구해 들어가니 여사 얼굴은 머리부터 코까지 압박 붕대로 동여매어 있었다. 압박 붕대 탓에 입 주위와 몸이 붓기 시작했다.”

-집도의인 심 교수는 어떻게 설명했나.
“수술 다음날 우리에게 ‘꼭 살렸어야 했는데… 5㎜만 비켜 갔어도…”라고 침통해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정년 퇴직 후 곧 돌아가셨는데 줄곧 말을 아꼈다.”

-심 교수가 박 대통령 내외의 주치의였나.
“그렇지는 않고 그가 신경외과 과장이어서 수술을 맡았다. 그날 심 교수는 골프 약속이 있었다. 아침에 비가 내려 약속을 취소하고 TV 앞에 앉았다고 한다. 화면 속에서 육 여사의 고개가 ‘딱’ 떨어지는 장면을 본 순간 ‘아. 내가 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병원으로 내달렸다고 하더라. 마침 병원에서 가까운 동대문 근처 신설동에 살고 있었다.”

-특실 수간호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나는 수술실과 301호를 옮겨 다니며 의료진과 박정희 대통령의 중간 메신저 역할을 했다. 수술이 성공했다면 육 여사는 301호에 입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육 여사는 끝내 301호로 가지 못했고 박 대통령과 가족들이 그 방을 지켰다. 그날은 마침 내 친구가 일본을 가게 돼 김포공항에 환송을 나갔다. 그런데 육 여사 저격 뉴스가 나오고 친구가 타려던 JAL기는 운항이 취소됐다. 문세광이 그 비행기 티켓을 갔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뉴스를 듣는 순간 육 여사가 서울대병원으로 오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달려 병원에 도착하니 막 수술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 대통령 회복실서 20여 분 이별
-수술이 끝난 뒤 어떤 일이 있었나.
“새 환자복의 육 여사를 회복실로 옮겼다. 수술실 옆이다. 멍한 상태였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박 대통령이었다. 100가지 감정이 응축된 표정이었다. 많은 것을 내포한 눈빛이었지만 눈물은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셨다. 우리는 나오고 두 분이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20~30분 정도였다. 회복실을 나온 박 대통령은 301호에 남아 있던 가족들과 함께 청와대로 떠났다. 손은 빙모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똑바로 걸었다.”

-육 여사는 그 후 어디로 모셨나.
“대통령이 떠나고 조금 후 노을 때문인지 하늘이 새빨개졌다. 정확하겐 보랏빛이 강한 빨간색이었다. 그때 직원들이 모두 육 여사가 돌아가셨다고 느꼈는데 정말 그랬다. 그때까진 인공호흡으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곧 임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7시30분쯤 청와대로 옮겼다.”

-베치코트 꿰맨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그날 밤 청와대에서 유류품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미 쓰레기로 처리된 상황이었다. 육 여사는 오렌지색 작은 물방울 무늬가 많은 한복을 입고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서 옷을 찢고 환자복으로 갈아 입힌 뒤 머리카락을 깎았다. 그런데 머리카락과 찢긴 옷가지가 쓰레기로 처리됐다. 그날 밤 전부 뒤져 찾아냈다. 꿰맨 베치코트도 나왔다.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류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박 대통령은 평소 301호실을 이용했나.
“입원한 적은 없지만 79년 10월 초 입원 계획이 있었다. 안과 수술이 예정돼 내가 동대문시장으로 침대시트·치약·칫솔 등 병실 비품을 사러 다녔다. 국산품이 아니면 대통령께 야단맞기 때문이었다. 1m65㎝ 체구에 맞춰 국산 가운과 슬리퍼를 장만했다. 하지만 부마 사태 등으로 입원이 연기되더니 10월 15일 입원한다고 다시 통보가 오고, 이어 10·26이 터졌다.”

YS·DJ, 야당 시절 정치적 입원
-다른 대통령들의 병원 생활은.
“현직 대통령이 입원한 경우는 없다. 다만 김영삼(YS)·김대중(DJ) 대통령은 야당 때 정치적 이유로 각각 입원하셨다.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DJ는 납치사건 이후 강제로 입원 조치됐다. YS는 5공 때 단식 투쟁하다 입원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퇴임 후 문병차 병원을 방문했다. 최규하·윤보선 대통령은 퇴임 후 질병으로 찾으셨다. 특히 윤보선 대통령은 당뇨와 고혈압이 있어 병원을 가장 많이 이용한 대통령이었다.”

-YS·DJ의 병원 생활은 어떻게 달랐나.
“김영삼 대통령은 항상 눈을 딱 감고 누워 있었고 한눈에 봐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대통령이 돼 서울대병원을 방문했을 땐 아주 활달하셨다.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면서 ‘아. 맞다. 간호부장은 여자이재…’라고 농담하시던 기억이 난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관리가 엄격했다. 머리 맡엔 늘 책이 있고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아끼고 평소에 별 말씀이 없었다. 그래서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라고 묻곤 했는데 답은 언제나 ‘예. 없습니다’로 한결 같았다. 문 밖에 늘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며 체크해서 더 그렇게 말씀하셨을 게다.”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무슨 이유로 병원을 방문했나.
“전 대통령은 자기가 임명한 총리 등의 고위 관리가 입원하면 면회차 병원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손자가 태어날 때 오셨다. 두 분도 대조적이었다. 전 대통령은 규모가 컸다. 잠깐 들르는데도 검은색 세단 3대가 한꺼번에 떴다. 노 대통령은 자동차 앞 좌석에 비서 한 명을 단출하게 태우고 왔다.”

-간호사 생활은 어땠나.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는데 1·4 후퇴 때 피란선 타고 내려와 피란민 수용소에서 살았다. 하루 세 끼는커녕 아침 한 끼를 제대로 못 먹고 살았다. 학교 갔다 오면 이모들이 줄 서서 얻어온 술 지게미를 먹고 컸다. 피란민 수용소가 판자촌인데 문 열고 들어가면 한 칸에 한 집씩 살았다. 아침이면 화장실 줄은 얼마나 길던지…. 아는 사람 한 명 없으니 그저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고학으로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열심히 일했다. 최선을 다하니 특실 병동에 뽑혀갔는데 못 볼 장면을 많이 봤다. 못 말리는 VIP 많더라.”

-어떤 장면인가.
“특실에 오는 분은 예외 없이 예외를 원했다. 특히 국회의원들은 병원 규칙을 가장 지키지 않는 분들이다. 아프지도 않은데 입원해 하루 종일 사람 만나고 물건이라면 모두 외제품이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 때 야당 의원은 민주주의 화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병원 생활하면서 환상이 많이 깨졌다. VIP가 입원하면 통상 우리 직원들이 알아서 예외를 감수한다. 그래도 힘든 일은 넘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애기 울음 소리 녹음하려고 병실에 녹음기를 켜 놨는데 간호사가 몰랐던 모양이다. 간호사가 ‘아기만 국산이네’라고 중얼거린 말이 녹음돼 난리가 벌어졌다. 어떤 장관님은 병원에 에어컨 고장 났다고 병원비를 깎으라고 호통치고…. 박정희 대통령 때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 중 쓰러져 5년 반이나 입원한 VIP가 있었다. 우리는 의식불명으로 알았는데 어느 날 TV에서 박 대통령 뉴스가 나오자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라.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통령들의 병원 생활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대통령들은 다른 VIP와 예외 없이 다르다는 게 공통점이다. 병원 생활이란 고통스럽다. 모든 대통령이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공통적으로 감정 표현을 자제했다. 한마디로 담아 두는 게 많은 분들이다. 자기 절제와 참을성이 특별하고 남다르게 강한 분들이 우리 대통령들이라고 생각한다.”

최상연 기자 choi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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