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1조원 사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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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6월 ‘롯데호텔 모스크바’ 부분 개관식에서 특별 제작된 크리스털 키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근 롯데가 한발 빠른 자금조달을 통해 적극적인 경영에 나서면서 금융이 ‘신동빈 경영’을 이해하는 키가 되고 있다.


지금은 터져버린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잠잠해진 것 같았던 몇 달 전이다. 신동빈(56) 롯데 회장이 그룹 고위 임원들에게 말했다. “위기가 넘어간 것 같지만 그리스와 유럽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 자금을 미리미리 확보해 두는 것이 좋겠다.”

 이후 롯데쇼핑은 홍콩에서 극비리에 전환사채(CB) 발행을 추진했고, 6월 15일 약 1조원(달러화 표시 5억 달러+엔화 표시 325억 엔)의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1조원이라는 규모도 규모지만 5년 만기인 CB의 금리 조건은 더 놀라왔다. CB의 표면 이자율은 0%. 사실상 1조원에 가까운 돈을 이자 한 푼 물지 않고 거저 쓰는 셈이다. 게다가 만기까지 갖고 있을 때 달러화 CB의 이자율은 0%, 엔화 CB는 -0.25%였다. CB의 만기 이자율이 마이너스라는 것은 만기 때 투자자에게 원금보다 덜 준다는 의미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박’이었다.

 미국발 쇼크로 국제 자금시장이 오그라들면서 신동빈 회장의 ‘금융가 본색’이 주목받고 있다.

 CB로 조달한 자금이 롯데에 입금된 것은 7월 5일. 한 달만 늦었어도 성사가 불가능했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위기가 오기 직전 두둑한 현금을 쟁여놓는 데 성공한 롯데는 하반기 이후에도 적극적인 경영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신 회장이 국제금융의 큰 흐름을 잘 읽는다”며 “좋은 조건에 자금을 미리 확보해 두도록 해 임원들이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 회장의 금융 안목이 빛을 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 롯데쇼핑의 런던·서울 동시 상장 추진 당시 그룹엔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풍부한 현금이 있는데 왜 이런저런 간섭을 받을 수 있는 상장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신 회장은 상장에 소극적이던 부친 신격호 총괄회장을 설득해 결국 상장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때 런던과 서울 증시에서 확보한 자금 3조6000억원은 이후 롯데가 국내외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의 시동을 거는 ‘시드머니’가 됐다.

 신 회장은 최근 롯데쇼핑에서 ‘부동산 업체’ 색깔을 벗기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에 따라 롯데쇼핑은 몇 년 전부터 땅을 사서 백화점이나 마트 건물을 짓기보다 기존 건물을 빌려 쓰는 쪽으로 변신하고 있다. 이미 전국 29개 백화점 중 건대스타시티점, 청량리점 등 5개 백화점은 기존 건물을 빌려 운영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를 가까이에서 목격한 신 회장은 땅을 직접 매입해 건물을 지어 백화점을 하는 시기는 지났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롯데쇼핑은 특히 지난해 말 국민연금공단에 롯데백화점 분당점과 롯데마트 5개 점포의 부동산을 팔고 재임대했다. 부동산을 무작정 붙잡아 두지 않고 자금을 조달해 쓸 수 있도록 유동화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 롯데는 약 6000억원을 마련했다. 외환위기 때조차 부동산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었던 ‘땅 부자’ 기업 롯데가 부동산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롯데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신 회장이 부동산 경기가 예전처럼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자산유동화에 신경쓰는 게 좋겠다고 강조했다”며 “롯데가 부동산을 판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신 회장의 금융 안목과 역량은 그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길러졌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는 20대 중반이었던 1981년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88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이었던 런던의 노무라증권 지점에서 근무하며 국제금융시장을 지켜봤다.

 롯데가 동양카드(현 롯데카드) 인수(2002년), 대한화재(현 롯데손해보험) 인수(2007년) 등 금융업으로 서서히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도 금융에 대한 신 회장의 깊은 관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금융은 앞으로 그룹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렬 기자

◆전환사채(CB,Convertible Bond)=채권의 일종으로 일정한 조건이 되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보통 전환가격을 정해두는데, 투자자들은 주가가 전환가격 이상으로 오르면 주식으로 바꿔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다. 주식으로 바꾸기 전에는 정해진 이자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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