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학습효과 … 개인들 던질 때 수퍼리치 “기다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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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양적 완화(QE3)가 발표될까. 글로벌 시장의 눈과 귀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입에 쏠리고 있다. 그가 9일(현지시간·한국시간 10일 새벽) 말문을 연다.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 회의를 마친 직후다. 글로벌 시장의 불안이 이어질지 여부가 그의 발언내용에 달려 있다. [AFP=연합뉴스]


“주가가 뚝뚝 떨어지니 전혀 손쓸 수 없었다. 주가가 회복하면 원금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다 팔고 다시는 주식 투자를 안 할 거다.”-소액 개인투자자인 전업주부 이경순(34)씨.

 “길게 본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참고 견뎠더니 결국 수익률을 회복하더라. 기다리겠다.”-모 증권사 PB점에서 30억원대의 자산을 굴리고 있는 수퍼리치 이정민(40·여)씨.

 코스피지수가 지난 2일부터 6영업일째 계속 빠지는 수직낙하를 이어 가면서 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8일 1900 선이 무너진 데 이어 9일 장중 184.77포인트까지 빠지자 투자자들의 패닉은 극에 달했다. 미처 손쓸 틈 없이 장이 꺼지는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개미’와 수퍼리치의 대응방식은 달랐다. 본지가 취재한 수퍼리치들은 차분하게 시장을 관망했다. 그러나 일반 개인투자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주식을 내던졌다.

 수퍼리치들을 관리하는 삼성증권 호텔신라점 프라이빗뱅킹(PB) 탁현심 팀장은 “대응전략을 의논하려고 고객에게 전화했더니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기다렸더니 나중에 수익을 냈다’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더라”며 “고객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수퍼리치들의 투자 내공이 깊어졌다. 그러나 대부분 소액 개인투자자는 그렇지 못했다. 하나은행 본점 골드클럽 유창윤 부장은 “소액 투자자들은 금융위기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며 “주가가 오르면 무조건 더 오를 거라 믿고 따라서 샀다가 떨어지면 공포심에 사로잡혀 주식을 내던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주부 이경순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9일 오전 11시19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 가격이 70만원대 아래로 떨어지자 그는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그냥 꺼버렸다. 그는 “70만원이 무너지는 순간 내 가슴도 무너지더라. 주가가 뚝뚝 떨어지는데 전혀 손쓸 도리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생각에 더 이상 모니터를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장 마감 전 70만원대 위로 다시 올라갔지만 이씨가 주식에 투자한 원금 4500만원 가운데 20%가량은 이미 허공에 사라졌다. 그는 “처음엔 용돈벌이 정도로 생각해 500만원만 투자했다. 그러나 한동안 사기만 하면 주가가 오르는 재미에 욕심이 생겨 은행에 넣었던 적금 1000만원까지 주식 투자에 쏟아부었다”며 “얼마 안 되는 여유자산을 주식에 ‘몰빵’한 게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9일 국내 증시는 크게 출렁거렸다. 오전 11시21분엔 전날보다 184.77포인트(9.87%)나 떨어지며 하루 만에 사상최대치(장중 낙폭 기준)를 갈아치웠다. 하지만 오후 들어 코스피는 낙폭을 크게 줄이며 전날보다 3.64% 내린1801.35로 마감했다. 서울 여의도 대우증권 딜링룸 모니터에 이날 하루 주가변동이 표시돼 있다. [강정현 기자]


 S전자 직원 김모씨도 비슷하다. 그가 보유한 모 종목 주가가 이날 하한가까지 밀리자 그는 2008년의 악몽을 떠올렸다. 당시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신용으로 산 주식이 맥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투자금을 다 날렸다. 불과 3년여 만에 또다시 투자 실패의 두려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수퍼리치들은 달랐다. 대부분 “길게 보겠다.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가진 자산이 상대적으로 많기도 하지만 3년 전 금융위기 이후 분산투자 원칙을 제대로 지킨 덕분에 공포 속에서도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올 상반기까지 이어진 상승장에도 불구하고 수퍼리치들은 주식 직접투자나 주식형 펀드에 ‘몰빵’하지 않고 분산투자를 했다.

 담당 PB의 권유로 지수형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증권사 PB 고객 D씨(49)는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상승장에서는 연 10% 내외의 지수형 ELS로는 만족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 상품이 정말 고맙다”며 “시장이 좋은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위기가 닥치니 원칙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수퍼리치가 개별종목형 ELS보다 수익률은 낮지만 좀 더 안전한 지수형 ELS를 분산투자의 한 종목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 지수형 ELS는 대부분 코스피지수가 1200~1300대까지만 빠지지 않으면 손실을 보지 않는 구조이거나 만기일 원금 손실 여부와 상관없이 가입 이후 매달 1%씩, 대략 연 12%의 수익률을 이미 꼬박꼬박 챙기는 상품들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수퍼리치들 중엔 더 적극적인 투자자도 있다. “지수가 더 내려가면 추가 투자를 하겠다”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은행 유 부장은 “고객 10명 중 8명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열에 둘은 지금 상황을 30~40% 할인해 주는 백화점 세일기간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한국투자증권 역삼지점 윤재원 차장도 “조급하게 움직이는 고객은 거의 없다”며 “장기투자했을 때 승산이 있다는 학습효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수퍼리치가 다 스마트 투자자는 아니다. 공포에 휩쓸린 수퍼리치도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최근 폭락장에서 부자들이 많이 투자하는 증권사 랩어카운트를 통한 손절매 차원의 매도 물량도 많았던 것으로 증권가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안혜리·고란 기자, 하지혜 인턴 기자(충남대 언론정보학)

◆수퍼리치(Super Rich)=‘부자 중의 부자’로 금융자산 30억원, 개인 자산 100억원 이상의 부자를 일컫는다. KB금융연구소의 부자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인 부자는 13만 명에 이른다.

◆금융위기 학습효과=주가지수가 급락하는 큰 경제위기 이후 단기간 내 지수가 급반등해 큰 수익을 올린 경험을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땐 6개월간 53%가 빠졌다 한 달 새 54% 급등했고, 2008년 금융위기 땐 한 달간 40%가 떨어졌다 열흘 만에 21% 급반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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