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21세기 신랑감 새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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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제는 잘하면 내보내고 싶은 사람을 쉽게 내보낼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내보내지 못한다면 급여라도 크게 깎을 수 있는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연봉제가 갖는 이 측면이 곧 연봉제의 어두운 부분이 된다.

50년대 신랑감의 첫째 조건은 직장이 있느냐였다. 60년대에 접어 들면서 그 조건은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로 바뀌었다.

21세기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신랑감의 첫째 조건은 연봉이 얼마냐로 다시 바뀌었다. 연봉의 크기는 신랑감의 평가기준으로서뿐만 아니라 젊고 늙은 것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값어치를 재는 공통의 잣대가 되고 있다.

또 연봉은 능력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격까지도 재는 기준이 되고 있다. 은행장의 연봉을 10억원대로 높이겠다고 하는데 그 10억원의 연봉엔 은행장으로서의 능력이 주로 반영돼 있겠으나 수천명의 은행원을 거느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격의 값도 필시 포함돼 있을 것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고액연봉의 시대이다. 억대의 연봉이 우습기까지 하다.

고액연봉도 모자라 스톡옵션을 안겨주기도 한다. 한 해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아메리칸 드림이 금세 이 땅에서도 실현될 기세이다. 벤처붐이 고액연봉을 부채질하고 있다. 고액연봉은 사람들의 전직을 분주하게 만든다. 고액연봉의 초빙을 받은 사람은 잘난 사람, 스카우트 한 번 받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신판 팔불출이 되고 있다.

한글로 표기돼 있으나 줄인 말의 영어식인 회사명을 가진 정체불명(앞날이 확실치 않은)
의 벤처일지라도 제시된 연봉이 많다면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데에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연봉제 빛의 부분일 뿐 그 이면엔 어두운 그늘이 있다. 빛의 부분에는 조명이 비쳐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연봉제라는 환상을 품게 되었지만 그늘지고 음산한 구석도 숨어 있다.

2년 전 IMF위기가 터지고 연봉제의 본격 도입이 논의됐을 때 사람들은 무슨 말을 했던가. 노조는 연봉제를 월급을 깎고 사람들을 내보내자는 사용자측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음모라는 소리에 발끈하기도 했으나 사용자측이 연봉제를 채택함으로써 고착화된 고용 및 임금구조에 구멍을 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연봉제는 본질상 단년(短年)
의 고용계약을 의미한다. 평생고용의 관행을 부인한다. 또 연봉제는 능력보상형 급여체계이기 때문에 연공서열의 임금체계를 부인한다. 노동시장의 경직화, 정년제에 따르는 종업원의 고령화와 잉여인력의 적체, 이에 덧붙여 생산성과 무관한 연공서열의 고임금 체계는 기업엔 큰 부담이었던 게 사실이다.

연봉제는 내보내고 싶은 사람을 쉽게 내보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내보내지 못한다면 급여라도 깎을 수 있는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연봉제가 갖는 이 측면이 곧 연봉제의 어두운 부분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 경기는 호전되었으며 오히려 기업으로 하여금 붙잡고 싶은 사람을 붙잡기 위해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게 만들고 있다. 연봉제의 어두운 부분이 덮어진 것이다.

그러나 호경기가 연봉제의 어두운 그늘을 덮어 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일단 경기가 나빠지면 연봉제의 그늘은 일시에 분출될 가능성이 크다. 고용 및 임금확보와 인원 및 임금삭감이라는 노사의 쟁점이 될 수 있다. 고액 연봉시대인 지금에도 그런 조짐은 보인다. 입사동기 혹은 비슷한 경력자끼리의 연봉격차를 벌리는 경향이 그것이다. 연봉제는 관점에 따라서는 승자를 위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자의 몫을 승자에게 몰아 준다. 그러나 이 승자를 위한 게임의 룰에도 문제가 있다.

승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룰은 미덥지가 않다. 승리의 보상은 매우 크지만 승자로 영원히 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프로 복싱의 챔피언이 언제인가는 링 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도전자에게 넘겨 주어야 하듯이 기업의 세계에서도 영원한 승자는 없다. 승리의 기간은 의외로 짧을 수 있다. 이 스트레스를 못이겨 안정된 직장으로 회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패자에게 이 룰이 가혹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프로모터라고 할 수 있는 기업엔 어떤가. 기업은 곧 사람인데 연봉제가 종업원의 동기부여는 될지 모르나 충성심을 훼손하는 것은 틀림 없다. 누가 승자인지 답은 좀더 기다려 봐야 한다.

정태성 FKI미디어 사장 <이코노미스트 제5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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