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내가 은행에 세 번이나 속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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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낮춰 경종을 울렸다. 이로써 70년간의 ‘미 국채=안전’ 신화는 금이 갔고, 미국의 신용등급은 일본·중국과 같아졌다. S&P의 이번 조치는 미국의 재정위기 극복능력과 미 정치권의 리더십에 대한 실망감 때문으로 보인다. 증세와 재정적자 감축 없이는 미 경제의 미래가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는 또 한번 요동치게 됐다. 미 유권자들 사이에 ‘신용등급 추락=모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제 우리도 외부 충격에 안전한지 꼼꼼히 점검해봐야 한다. 외견상 경제 펀더멘털은 정부의 주장대로 튼튼해 보인다. 물가 상승률이 다소 높지만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어오고, 경상수지는 17개월 연속 흑자다. 7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311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라면 해외 변수에 과민(過敏) 반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장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거리가 있다는 게 문제다. 한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115 bp(1bp=0.01%)로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여전히 불안감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주체별로 보면 대기업은 별걱정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정부와 가계다. 한국이 과거 경제위기에서 재빨리 탈출한 것은 건전한 재정과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저축률 덕분이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지난 13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정부 부채 수준이 훨씬 낮다”는 주술(呪術) 속에 재정건전성은 크게 망가졌다. 가계 사정은 더 나쁘다. 가계저축률은 OECD 회원국 중 꼴찌이며,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46%로 서브프라임 사태 직전의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단기간 내에 치유하기는 어렵다. 당장 급한 것은 외화유동성 확보다. 하지만 모건스탠리와 노무라증권이 한국의 대외부채 상환능력이 아시아 8개국 중 가장 낮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외환보유액은 많이 늘어났지만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하면 36%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또 가장 불안한 유럽계 자금이 많이 들어와 있고,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31%로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이들이 갑자기 이탈할 경우에 대비한 비상계획(contingency plan)부터 시급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방심하다 유탄을 맞은 쓰라린 경험이 적지 않다.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 외국 투자자들이 곧바로 외채 상환능력을 의심하고, 결국 금융기관들의 외환건전성을 문제 삼아 위기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이제는 미리 경상수지 흐름과 가용(可用)외환보유액이 얼마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금융기관들이 적정 예대율을 지키고 있는지, 외화차입의 만기연장은 제대로 되는지, 단기차입의 비중이 너무 높지 않은지 꼼꼼하게 짚어봐야 한다. 아시아에서 새로 탄생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기구는 제대로 작동될지, 3년 전 큰 효과를 본 한·미 통화스와프를 재가동할 수 있는지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은행들이 아무리 괜찮다 해도 믿지 말라. 내가 세 번이나 속았다”고 경고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대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선제조치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지 않은가. 또다시 밀려오는 세계 경제의 쓰나미 앞에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될 일이다. 금융기관의 부실은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쓸어내야 한다. 마른날엔 흥청대다 비가 쏟아지면 우산을 거둬가는 은행들의 잘못된 행태는 누구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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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금융위원회 위원장
[前] 재정경제부 제1차관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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