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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일본의 벤처산업]中. '비터 밸리'의 '비트 밸리'

중앙일보

입력

24시간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도쿄(東京)의 시부야(涉谷).전철역 광장에서 246번 국도를 따라 도겐자카(道玄坂)로 향하다 보면 길 양쪽으로 크고 작은 오피스 빌딩들이 들어서있다.

이곳이 일본 벤처기업들의 둥지인 '비트 밸리(bit valley)'다. 세계의 하이테크 단지가 모두 그렇듯 그냥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빌딩들이다.

일본열도에 본격적인 벤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9년 3월 넷에이지의 니시가와 기요시(西川潔)사장이 '비터 밸리(bitter valley)'구상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기요시사장은 AOL·마이크로소프트·넷스케이프의 일본 법인과 자사와 같은 벤처기업이 시부야에 옹기종기 몰려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곳의 벤처기업들간 상호교류·정보교환을 제안했다.

시부야를 미국 실리콘밸리와 같은 벤처의 본바닥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비터 밸리라는 이름은 씁쓸하다는 뜻인 '시부(涉)'와 계곡이라는 뜻인 '야(谷)'를 영어로 직역한 것이다.나중에 이름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디지털을 뜻하는 'bit'로 개칭했다.

시부야에 벤처기업들이 모이게 된 것은 임대료가 싼데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다.손정의(孫正義)씨의 동생 손 타이조(孫泰藏)의 인디고를 비롯,인터Q·호라이즌 디지털·뉴즈베즈·아스키·디지털 개리지·키노트로프·e머큐리·에이걸·VCN·DeNA 등 쟁쟁한 벤처기업들이 모두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이 지역 기업가들이 조직한 비트 밸리 어소시에이션의 회원 수는 초기 50명에서 지금은 5천1백명을 넘어섰다.

비트 밸리 구상은 젊은 벤처기업인들의 호응을 얻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올들어서는 오사카·나고야·삿포로·치바 등 지방의 벤처기업들도 비트 밸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비트 밸리는 이제 지역 개념을 넘어 일종의 벤처 창업운동이 됐다.

비트 밸리 운동으로 전국적인 벤처 열풍이 일자 금융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쿄미쓰비시(東京三菱)은행과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가 공동으로 2백억엔의 투자펀드를 설립했다. 아사히 은행도 벤처 투자조합을 결성했으며,산와(三和)은행은 비트 밸리 사무소를 따로 냈다. 신용금고들도 11곳이 모여 올초 25억엔의 벤처 투자기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비트 밸리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적지 않다.금융기관이 투자에 나서고는 있으나 운영자금 대출은 여전히 어렵다.벤처기업에 대한 신용분석 기법이 미숙한 탓이다.

예컨대 지난해 나스닥에 직상장한 인터넷 접속사업체 IIJ의 신용평점은 56점에 불과하다.경영이 어려운 닛산자동차도 69점이나 되는데 미국에서 인정받은 기업이 대출억제 업체로 묶여있는 것이다.

한국처럼 벤처기업에 세제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지 못하는 벤처기업은 벤처 취급도 못받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3월들어 벤처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고 있다. 한때 7천7백41만엔까지 올랐던 인터넷총합연구소의 주가는 2천2백만엔대로 하락했고,2천3백11만엔이던 멧츠의 주가도 2백80만엔 언저리로 내려 앉았다.

제조업 지상론자들의 공격도 만만치 않다.히토쓰바시(一橋)대학의 세키 미쓰히로(關滿博)교수는 "인터넷 벤처가 훌륭한 사업이기는 하지만 자동차·전자와 같이 일본의 산업계를 리드할 주류로 자리잡게 될 지는 아직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비트 밸리가 장차 세계적인 벤처의 메카로 발돋움할 지, 쓴잔을 들이키고 돌아서는 비터 밸리로 주저앉을 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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