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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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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일하며 행동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공동체. 어떤 공동체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잘 조직된 공동체인 경우에는 엄청난 결집력과 일체감, 무서운 단결력 등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수월한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폐쇄성이 짙고, 이 집단에서의 개인은 개인이 아닌 전체를 이루는 한 조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심한 폐쇄 집단에는 개인의 성찰 능력이 훼손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아주 상실해 버린 사람도 많다.

 1967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고등학교 역사교사가 나치에 관한 수업을 한다. 한 학생이 전체 독인인의 10%밖에 안 되는 나치당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나머지 90%의 독일 국민은 왜 침묵했는지를 물었다. 교사는 명확한 답을 찾기 위해 학생들에게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실험을 한다(책으로도 출간된 이 얘기는 2008년 ‘디 벨레’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006년에는 ‘파도’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서로도 나왔다).

 먼저 교사는 학생들에게 제안을 한다. ‘내 말에 절대 복종하는 자는 권력을 주겠노라. 교실에서 파도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파워를 한번 느껴보자’고. 그 과정은 이렇다.

 공동체 안에서는 대답할 때마다 매번 선생님을 철저하게 존칭하고, 절도 있는 자세와 집단을 대표할 만한 상징과 구호도 만들고, 자기들만의 파도타기 인사법도 만들고. 이에 동참하지 않는 애들에겐 왕따와 위협, 집단 구타도 하고.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학교생활 부적응자일수록 더 열성적으로 빠져들며 광신도로 변해가더란다.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학생에겐 ‘이 통제야말로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서 칭찬도 해주었다.

 드디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집단이 하루가 다르게 권력 조직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실험이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 살아 꿈틀대는 ‘운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집단은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듯 점점 더 큰 권력괴물로 변해가는 반면, 개인들은 자기 생각이 없는 듯 기계의 부속품같이 그저 명령만을 따를 뿐이었다. 조직의 폐단을 아는 몇몇 학생조차 공포심과 두려움 때문에 쉽게 나서지도 못한다. 작은 교실 안에서의 독재집단. 나치시대 독일의 전체 분위기도 이와 흡사했으리라.

 인간의 본성 안에는 이런 허약함이 있다. ‘내 편 아니면 다 적’이란 잘못된 생각과 권력이 사람들을 쉽게 집단주의나 집단광기로 빠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단체이건 군대이건, 누구든지 억압받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과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제공돼야 된다.

 귀신 잡는 해병, 요즘은 유령인간만 만든단다. 가혹행위가 어디 해병대만의 문제겠느냐만서도 이에 대해 말도 많다. ‘기수열외’라는 게 있단다. 고참이 누구 한 명을 지목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유령인간이 되고 후임병에게도 무시와 괴롭힘을 당한다는 따돌림. 이게 해병대의 ‘오래된 전통’이란다. 멀쩡한 사람이 유령인간 취급을 당한다? 일생 최대의 수치심을 안겨줄 그것이 그들만의 ‘오래된 전통’이란다.

 엄청난 결집력, 일체감, 무서운 단결력. 이제는 여기에 ‘원활한 소통’을 보태야 할 때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