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불같은 열정의 하모니,대관령이 새롭게 태어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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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03면

1 1977년의 정명화(왼쪽)·경화 자매. [중앙포토]

대관령 품는 첼로의 저음
정명화씨는 첼로와의 인연을 두고 “내 목소리와 어울리는 악기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성악ㆍ피아노 등을 두루 배우다 11세에 첼로를 시작했다. 제법 늦은 편이다. 하지만 어머니 고(故) 이원숙 여사(왼쪽 작은사진)는 선생님을 매일 집으로 불렀다. “나중에 계산을 해보니 일주일에 한 번 받을 레슨을 매일 받는 바람에 11세가 아니라 7세에 첼로를 시작한 것처럼 됐다”고 했다. 이전에 배워놨던 노래ㆍ피아노 실력은 이런 심화학습에 불을 붙였다. 그는 첼로를 처음 잡은 지 2년 반 만에 콩쿠르에 나가 우승했다.“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땐 음색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첼로는 달랐다. 내 악기라는 예감이 왔다.” 그의 목소리는 실제로 넓고 깊다.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레슨할 때는 특유의 넉넉한 음성으로 고즈넉한 노래를 불러준다.

제8회 대관령국제음악제 공동예술감독 맡은 정명화ㆍ경화 자매

2 25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앞 노란색 루드베키아와 금계곡이 넘실거리는 꽃밭에서 포즈를 취한 정경화(왼쪽)·명화 공동 예술감독. 사진 최정동 기자

대관령에서도 손님들을 넉넉히 품는다. “나와 경화가 처음 참가한 음악 축제는 69년 이탈리아의 스폴레토 페스티벌이었다. 그때 우린 학교를 갓 졸업한 20대였다. 연주료도 거의 안 주고 비행기 삯만 딱 맞춰 줬다. 그래도 가는 것만으로 신났다.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와서 수많은 실내악 작품을 이런저런 조합으로 연주하는 데에 푹 빠졌다.” 대관령 국제음악제에 연주하러 오는 국내외 음악가들에게도 이런 경험을 만들어주려 한다. 그들에게 대관령을 이런 곳으로 만드는 꿈을 꾼다. “처음엔 한평생 연주만 하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한 내가 어떻게 축제를 이끌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해보니 조직하고 계획하는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 정경화ㆍ명화ㆍ명훈의 ‘정 트리오’중 첫째였던 그는 이처럼 대관령에서도 따스한 맏이 역할을 해내고 있다.

대관령 달구는 바이올린의 열망
“언니, 나는 이 이상 즐거울 수가 없어. 천당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아.”
대관령에서 정경화씨는 언니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그는 음악제가 열리는 알펜시아 리조트에 몇 주 전부터 미리 와 머물고 있다.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연습이다.
“새벽 두 시에도 일어나 바이올린을 잡는다. 하루에 20시간쯤 연습할 수 있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생각한다. 여기 와서 음악제 첫해를 시작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음악 작품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가 없다. 몸이 빠그라지더라도 하고 싶다.”
그는 5년 정도 바이올린을 잡지 못했다. 왼손 부상 때문이었다. 70년대부터 세계 무대에서 ‘동양의 마녀’로 불리던 바이올리니스트가 가진 최초의 휴식이었다.

“절망했거나, ‘나는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참기 힘들었을 일이다. 하지만 ‘손이 이렇게 된 건 신의 어떤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상을 당하기 전엔 일주일에 세 번씩 연주하러 다녔다. 아프지 않았으면 계속 연주밖에 안 했을 거다. 바이올린과 나는 지독한 인연이기 때문에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아픈 ‘덕분에’ 딱 놨다.”
쉬는 동안 그는 평범한 삶을 즐겼다. 오랜 취미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줄리아드 스쿨에 들어가 제자도 길렀다.하지만 무대에 대한 불길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나는 무대에서 사는 사람이다.” 대관령에서 그는 이 같은 열망을 다시 터뜨리고 있다. 축제의 이튿날인 29일, 언니와 함께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했고 다음달 5일에는 프랑크 소나타를 독주한다.

두 악기의 화음
자매는 5월 어머니 이원숙 여사를 떠나보냈다. 일곱 남매 하나하나를 정확히 파악해 길러낸 인물이다. 스스로 예순 넘어 신학 공부를 시작했던 사람이다. 자매는 추모 연주를 올해 내로 열 계획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연주를 하더라도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무대에 설 때마다 어머니가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정경화) 대관령의 무대도 그렇다. 그들이 대관령을 세계로 내보내려 하고, 국제적 연주자들을 데려오려 하는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경험과 생각엔 주인이 다 있다. 그래서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돼 있다. 그 주인이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이다. 고국에 힘이 되는 무언가를 돌려주는 것이 어머니의 가장 강력한 가르침이었다.”(정명화)

3 29일 저녁 연주를 마친 정명화, 케빈 케너, 정경화씨(사진 왼쪽부터)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대관령국제음악회 조직위 제공.

“한국에 세계적 음악제 하나 만들자.” 다양하고 오래된 경험으로 무장한 정명화, 음악에 대해 불타듯 뜨거운 열정이 여전한 정경화가 함께 품고 있는 생각이다. 지금 대관령이 심상치 않은 이유다.

폭우 희생자에게 바치는 연주회
“연주한 지가 오래된 곡이라 연주에만 집중해야겠지만, 한 말씀 꼭 드려야겠습니다. 서울에 엄청난 폭우가 내려 희생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이번 연주를 바칩니다. 희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29일 저녁 강원도 대관령 알펜시아 콘서트홀. 무대에 나선 정경화씨가 입을 떼었다. 이어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1번의 신중한 선율이 울렸다. 이번 제8회 대관령국제음악제의 이틀째 무대였던 이날은 축제의 이른 하이라이트였다. 공동 예술감독인 정명화ㆍ경화 자매가 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7년 만이었다. 2004년 어머니의 85번째 생일을 한 해 늦게 축하하기 위한 정트리오 무대 이후 자매가 함께 한 첫 무대였다. 자매는 막내 정명훈(58)씨 대신 미국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함께 브람스를 연주했다.

폭우 희생자 추모와 함께 시작한 연주는 담담했다. 보통 장중히 연주되곤 하는 1악장에서 자매는 조금 빠른 템포를 선택했다. 덕분에 음악은 인공적으로 꾸민 기색 없이 흘러갔다. 2박의 경쾌한 2악장은 오히려 담담하게 표현했다. 느림과 빠름의 두드러지는 구분 대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체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는 브람스에 대한 편견, 즉 두텁고 무겁다는 생각을 세련되게 바꾼 해석이었다. 자매의 음악은 고즈넉한 대담 같았다.

2005년 손가락 부상으로 무대에서 은퇴했던 정경화씨는 지난해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람스 협주곡으로 돌아왔다. 이번 무대는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신고식이었다. 연주를 앞두고 만났던 그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날카로운 기품과 비극적인 고음은 그대로였다. 여기에 인간미가 더해졌다. 1악장에서 피아니스트와 약간의 엇박자가 생겼을 땐 미소로 보듬었다. 날카롭고 활화산 같던 소리 대신 음악 전체에 대한 따뜻한 호소가 느껴졌다. 연주 후 정경화씨는 “무대에서 브람스의 첫 첼로 선율을 듣는 순간 눈물이 확 쏟아져 고개를 돌려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자매가 정명훈씨와 함께 브람스를 녹음했던 1994년 음반엔 더할 수 없는 팽팽함이 있었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이날의 브람스는 욕심도 과장도 없는 수채화 같았다. 치열한 젊은 연주자가 따라잡을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이해가 우러나왔다. 이제 이들은 ‘젊음’을 ‘깊음’으로 치환했다. 정명훈씨까지 함께하는 정트리오의 복귀를 더욱 기대케 하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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