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아픈 가족사 건드리는 부양의무자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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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선임기자

“우리 가정이 잘못되면 당신 탓인 줄 알아.”

 서울 강북의 모 구청 복지공무원은 며칠 전 이런 거친 항의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딸(20)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을 우려한 50대 아버지의 항의였다. 사연인즉 이렇다. 그의 딸은 지금의 엄마(계모)를 친엄마로 알고 있다. 사실은 딸이 두 살일 때 시집온 계모다. 그런데 이번에 구청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受給者:옛 생활보호대상자)인 생모의 부양의무자를 조사하다 딸이 튀어나왔고, 그녀에게 “부양 의무가 있다”고 우편물을 보낸 것이다. 딸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아버지에게 물었고 아버지는 “잘못 온 우편물”이라고 둘러댔다.

 6월부터 기초수급자 155만 명의 부양의무자를 조사하면서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다른 구청에는 한 할머니가 손녀의 출생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소연한다. 또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재혼한 여성이 과거가 탄로날 위기에 처했다. 지방에서는 파양(罷養·양친자 관계를 소멸시키는 행위)한 경우도 있다. 기초수급자(30) 양부의 소득·재산 기준이 초과해 탈락 위기에 처하자 파양을 선택한 것이다.

본지 7월 26일자 2면.

 현행 국민기초생활법은 기초수급자의 ‘1촌 이내의 혈족과 그 배우자’에게 부양의무를 지운다. 과거에 이혼해 거의 남남이 된 생모나 생부도 해당된다. 종전까지 타 시·도에 사는 자식은 잘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통합관리체계를 갖추면서 가정이 위협받는 경우가 속출하는 것이다.

 어떤 집이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가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런 상처가 많이 났다. 47년 전 이혼하면서 자식을 버리고 떠난 생모의 부양 문제로 고뇌하는 59세 목사(본지 7월 26일자 2면)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한 독자는 “목사를 도울 방법이 없냐”고 안타까워했다.

 이번 부양의무자 조사가 자칫하다간 가정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만의 하나라도 그런 경우가 있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부양의무 규정을 없애고 조사를 없애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정과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시기상조다. 대신 그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것이 대안일 것이다. 남의 가정사 확인작업이 일선 공무원들한테도 못할 짓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 호적을 따져보고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

신성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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