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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유럽, 내부 적에 떨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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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노르웨이 오슬로 교외에 위치한 교회에서 24일(현지시간) 열린 애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꽃을 바치고 있다. 이틀 전 오슬로 도심과 우퇴야 섬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로 최소 76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의 땅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최악의 테러에 전 세계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오슬로 로이터=뉴시스]


“노르웨이는 그동안 경계해 온 국제 테러조직이 아닌 국내에서 자생한 내부의 적에게 당했다. 유럽은 지금 자기 안에 자리한 악마를 두려워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의 진단이다.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연쇄 테러에 충격을 받은 유럽의 현 상황을 이같이 표현했다. 이번 테러가 알카에다 등 국제테러조직이 아닌 극우 기독교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내국인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 전역이 긴장하고 있다.

 노르웨이 경찰치안국(PST)은 올해 초 펴낸 보고서에서 “국내에 극우 세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AP통신은 “유럽 국가들이 이슬람계 테러단체의 위협에만 신경 쓰다 내부의 극우세력 감시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유럽 공동경찰기구인 유로폴은 뒤늦게 유럽 내 우익단체에 의한 잠재적 테러 위협에 대해 조사를 진행할 태스크포스(TF) 팀을 꾸렸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 다문화주의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고 전했다.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은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성명에서 “진보주의·다문화주의로 가장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글에서 무슬림(이슬람교도) 이민자들과 다문화주의 정책을 편 정부에 대한 광기 어린 분노를 드러내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했다.

 유럽에선 관용과 조화를 중시하는 다문화주의가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이민자들이 가진 문화·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하자는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이 중·동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이민자가 폭증하고, 최근 도미노처럼 번지는 유럽 국가의 재정위기로 내부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노르웨이의 이민인구는 프랑스 등 서유럽에 비해 적은 편이다. 하지만 2009년 총선에서 승리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와 노동당이 적극적인 이민자 포용정책을 펴면서 유입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상당수가 가난한 나라 출신인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복지 혜택을 빼앗아 간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기독교 전통의 유럽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무슬림 이민자들이 타깃이 됐다.

 유럽 각국에선 ‘반이민주의’를 기치로 내건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극우포퓰리즘, 기독교 원리주의, 신나치주의 등이 확산되면서 자생적 ‘반이슬람 테러조직’이 유럽사회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CNN은 “1980년대 이후 유럽에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의가 고조돼 왔다”며 “극우주의가 르네상스를 이룬 시점에서 노르웨이 테러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미 주요 유럽 국가에선 다문화주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모스크(이슬람 사원) 건축을 금지하는 주민투표가 통과됐고, 프랑스·벨기에에선 무슬림 여성 전통 의상인 부르카 착용이 법으로 금지됐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군·경찰을 동원해 로마(집시)를 강제로 추방해 논란이 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다문화사회를 건설해 공존하자는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최근 다문화주의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들 국가의 행보는 반이민자·반무슬림 입장이 일부 극우정당이 아닌 정계의 주류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로이터 통신은 “비슷한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선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쟁을 생산적으로 진행하고 이를 통해 유럽 사회의 내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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