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 된 강남좌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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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02면

진보학자로 평가되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쓴강남좌파라는 책이 화제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문재인·유시민과 서울대 조국 교수 등 이른바 진보진영 인사들을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강남좌파’다.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계층을 앞세우지만 결국은 다들 권력엘리트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깔고 있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사실 강남좌파라는 용어는 참 멋있다. 거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강남’이라는 단어가 부여하는 부와 풍요의 냄새가 배어 있다. 실제로 강남에 사느냐 안 사느냐는 별개 문제다. 그러면서도 좌파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혁명적 열정, 평등주의,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느끼게 한다. 내 동창 하나도 만나면 스스로 강남좌파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강남의 변두리지만 아무튼 강남에 살고 있는데 민노당 당원이라는 걸 밝힐 때의 그의 얼굴에선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진다.

나는 강 교수의 주장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이다. 20여 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꽤 많은 정치인을 만났고 그들이 사는 모습을 봐 왔는데, 요즘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게 결국 권력 엘리트들이 표를 얻기 위한 치장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식 문제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좌파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건 물론 우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좌파는 인간의 이기심을 질타하고, 평등을 강조하니 상대적으로 그런 모습이 더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다.

7~8년 전 워싱턴 특파원 때는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청와대 관계자 자제들이 학군이 매우 좋은 지역 중·고등학교에 유학 와서 다니는 걸 봤다. 비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부모 된 입장에서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국내에선 평준화 교육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걸 보면 비애감이 적지 않았다. 내 자식은 해외유학 아니면 대안학교나 외국어고·특목고에 보내면서 나머지 애들은 평준화 교육을 해야 한다? 위선이란 비난을 들어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불평등과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감을 부추기는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해서 적지 않은 인세를 받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했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몰래 해서 그런가? 물론 강준만 교수의 지적대로 “성자가 아니면 입 다물라(Saint or shut up)”고 주장하는 극단주의는 옳지 않다. 내가 잘못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가야 할 지향점을 얘기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나 인간적 약점과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부동산 투자가 됐든, 자녀 교육이 됐든, 세금 문제든, 직장이든,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을 통해 얻어지는 혜택을 흠뻑 누리면서 남들에게는 평등을 외쳐대는 극단적 이중성은 위선이다. 좀 엉뚱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만일 좌파의 이념이 가난하고 능력 없이 태어난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거라면 이태석 신부님이야말로 그런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분이라고. 그것도 민족과 피부색깔까지 완전히 뛰어넘어서 말이다. 민초와 민중을 외치는 강남좌파의 그 어떤 화려한 언설보다도 이 신부의 삶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는 얘기다.

1848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통해 공개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좌파 이념은 1991년 소비에트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사실상 사망했다. 자본주의는 대공황부터 시작해 최근의 금융위기까지 수없이 많은 위기상황을 겪었지만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사회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젠 좌파냐 우파냐의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어떤 정책이 더 효과적이냐는 실용성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한국에서만큼은 아직도 좌파니 우파니 하는 용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라지기는커녕 ‘네모난 삼각형’처럼 그 자체로는 형용모순일 수도 있는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일종의 패션처럼 퍼져 가고 있다. 강남좌파니, 온정적 보수니 하는 건 어쩌면 말장난이다. 유권자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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