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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1. 청산별곡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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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혹스러웠다. 굵은 눈물과 호탕한 웃음을 거의 동시에 터트린 이 세도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내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정안은 청자 주전자를 들어 찻종지에 기울인다. 우려낸 차가 가득하다. 뚜껑과 몸통 주둥이 사이에 떨어진 눈물도 찻종지에 보태졌을까. 주전자를 내려놓고 찻종지를 든 정안은 일연과 내 찻잔을 채운다.

 “아시다시피 나는 고려대장경을 다시 새기는 데 여생을 걸었다오.”

 찻잔을 입에 댔다. 짠맛이 날 리 없지만 꼭 정안의 눈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일연은 보았을까, 아까 그 눈물 방울을.

 “내가 손수 필사한 『묘법연화경』을 집정에게 바친 게 어언 열두 해 전이오. 강화도로 천도를 강행한 이후 전국에서 거의 매일같이 민란이 일어나던 때였지. 어떻게 수습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오. 밖에서는 몽골군, 안에서는 화적패들, 게다가 승가에서도 조짐이 심상치 않았소. 정축년 정월의 그 끔찍한 악몽이 재현될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오.”

 일연과 나는 거의 동시에 아미타불을 찾으며 합장한다. 고종 4년(1217) 정월, 거란군에 맞서 일어선 승군(僧軍)들이 최충헌에게로 칼날을 돌렸다. 최충헌은 기선을 제압하고 무려 800명의 승군을 참살했다. 다다음해 최충헌이 죽고 최이가 정권을 물려받았다. 원한 쌓인 승가와의 화해는 최이의 급선무였다.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내가 최이 집정을 만나 애원했소. 누이가 친조카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래도 우린 처남 매부지간 아닌가. ‘외길 수순이다. 대장경 재조 불사를 하자. 민심을 수습하고 승가의 원한을 회향하는 건 이 길밖에 없다. 판각 비용의 절반은 내가 대겠다.’ 이렇게 해서 국책사업을 벌이게 된 거요.”

 “공께서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아직 멀었소. 얼추 마친 거 같지만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요. 꼼꼼히 톺아봐서 하자를 바로잡아야겠지요. 난 결점 없는 성물(聖物)을 원하오. 그래서 일연 선사를 모신 거요.”

 정안은 나의 치사를 사양했다.

 “빈도가 감당키 어려운 일입니다.”

 “일연당이 아니면 어느 누가 그 일을 하실 수 있겠소이까? 그나저나 수기 도승통과 천기 승록은 강녕하시지요?”

 “무탈하십니다.”

 나는 바랑에서 간찰을 꺼내 건넸다. 정안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었다. 그는 인보에게서 받은 최이의 간찰도 마저 읽었다.

 “집정께서 날 올라오라시는데 글쎄요, 내게 그럴 짬이 날까 싶구려.”

 정안은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다.

 “판당에 가서 경판들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보안 변산 공방 김승이 맡은 경판들은 어떤가요?”

 “그야 최상품이자 명품이지요. 판당부터 보고 공방도 둘러보시도록 하시오.”

 나는 정안을 따라 판당으로 향했다. 일연도 동행했다. 남해 분사대장도감이 주관해 판각한 경판이 강화도 선원사 판당의 경판보다 되레 많았다.

 “이곳도 바닷가인데 뒤틀림 현상은 없습니까?”

 “당연히 있소이다. 마구리가 쪼개질 정도로 뒤틀린 것도 생기더군요.”

 경판 양쪽에 끼워 달아맨 마구리는 뒤틀림을 방지하고 인쇄할 때 편리한 손잡이가 돼주었다. 경판보다 더 두꺼운 마구리는 경판을 쌓거나 밀착할 때 틈을 만들어줘 글자가 손상되는 걸 막고 통풍 효과도 있었다.

 정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집사에게 뒤틀린 것을 뽑아보라고 일렀다. 선원사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도 대책이 필요하군요.”

 “네 모서리를 구리 장석으로 감싸고 쇠못을 박아서 쪼개짐은 방지했소. 하나 습기로 인한 뒤틀림과 곰팡이는 막을 수 없었소.”

 “판당을 내륙지방으로 옮기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할 때로군요. 수기 도승통께서 공과 함께 그 문제도 상의해보라 하셨습니다.”

 “아까 간찰에서 읽었소. 몽골군의 마수가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을 찾을 수만 있다면야 당장 그리 옮길 일이오.”

 “개경에서 그 멀고 험한 팔공산 부인사까지도 습격해서 대장경을 불태운 저들입니다. 어딘들 못 가겠소이까?”

 일연이 임진년 겨울의 그 참사를 상기시켰다. 나는 검은 기억 속에 피어나는 새빨간 잉걸불이 떠올랐다. 나는 나쁜 기억을 털어내듯 도리질을 쳤다.

 “김승 공방에서 납품한 경판들을 좀 볼까요?”

 “그 사람 신의 손을 가진 자요.”

 정안은 집사에게 공방을 표기한 목록을 달래서 김승이 새긴 경판들을 찾아냈다. 집사가 격자시렁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경판 하나를 빼 보였다. 나는 그 경판을 받아 들고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러기를 몇 장이나 거듭했다. 초기 납품본, 최근 납품본을 무작위로 뽑아보기도 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완벽했다.

 “김승 공방 경판들 맞습니까? 서명이 하나도 없군요.”

 선원사 대장도감에 올려 보낸 경판에는 서명이 있었다.

 “경판들을 다섯 장씩 포장해 담은 상자에 서명이 있었답니다.”

 집사가 말했다. 대장도감 납품본과 분사대장도감 납품본을 참 뚜렷이도 구분해놓고 있었다. 김승, 과연 치밀하고 완벽한 사람이다. 여기 것만 보면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판당을 나와 아래쪽 공방으로 갔다. 큼직큼직한 공방마다 대여섯 명의 각수들이 작업대 앞에 앉아 망치로 조각 칼을 두드리고 있었다. 선원사 공방과는 비할 바 없이 큰 규모였다.

 “저쪽 삼봉산 너머 화방사에는 제지소(製紙所)가 있소이다. 닥나무를 길러서 직접 외발 뜨기로 최상급 종이를 뜨오. 남해 고을 전체가 오롯이 대장경 불사에 매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정안이 그 모든 경비를 대고 있었다. 불사에 전념하는 그의 신심과 권능은 높이 살 만했다. 경전에도 밝아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두어 식경 뒤, 삼봉산 밑 정안의 저택으로 가 여장을 풀었다. 정안의 집은 화려했다. 강화도 진양부 최이 집정 저택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짜임새가 있었다. 처남과 매부 모두 황제가 부럽지 않게 살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저녁 자리에 불려갔다. 커다란 연회장에는 악공과 무희들이 흥을 돋우고 있었다. 언제 기별했던지 남해 현령과 화방사 주지도 와 있었다. 정안의 소개로 그들과 통성명을 했다. 일연 옆에 앉은 노파는 뜻밖에도 속가의 어머니라고 했다. 환갑쯤 돼 보였다. 소년 시절 출가한 이가 이 먼 여행지에 어머니를 모시고 온 까닭이 궁금했다.

 “바다를 몹시 보고 싶어 하셔서 모시고 왔지요.”

 일연은 천연덕스레 말했다.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더 큰일, 중생구제를 위해서 사사로운 가족 관계를 끊고 산문(山門)에 들어온 수행자가 중이다.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 중에게는 없어야 할 것이 있었다. 사람들 다 하는 것, 중은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었다. 머리 깎고도 세속과 똑같이 살 요량이면 중 된 이유가 없었다.

  “선종과 교종 모두에 정통하신 분! 그야말로 기린의 뿔같이 귀한 분이 여기 계신 일연 선사올시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일찍이 홀로 되신 노모를 정성으로 봉양하지요. 인연을 끊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연들을 고스란히 떠받드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모름지기 본받아야 할 미덕입니다.”

 만찬에 앞서 일연을 소개하면서 정안이 한 말이었다. 나를 ‘강도(江都) 대장도감에서 나온 승정’이라고만 소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랬다 해서 시샘이 난 건 아니다. 수행자가 가족이나 친지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친친(親親) 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줄곧 승가의 보편적인 관습과 계율, 수행자 개인의 특수한 처지와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 경우에는 속가 인연들과 왕래를 끊어왔다. 여색 또한 독사 대하듯 하여 청정비구임을 자부해왔다. 그래서 득도를 하고 중생구제를 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입때껏 중노릇 해오면서 큰 허물은 짓지 않았다.

 “대장경 낙성식을 보고 눈을 감아야 할 텐데….”

 연회가 끝나고 현령과 화방사 주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정안이 마당에 서서 읊조렸다. 일연은 노모의 잠자리를 돌봐주고 돌아와 있었다. 암청색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은하수가 북녘 하늘로 길게 가르마를 타고 흘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년 말이면 회향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이 일에 자그마치 16년간 매달려온 내 소망이기도 했다.

 “노인성(老人星)이 조림하는 이곳 남해에서 천수를 다하셔야지요.”

 일연이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노모를 모시고 온 뜻이 따로 있었던 듯싶다. 노인성 기운을 받아 오래오래 사시라는 효도관광 말이다.

 “고맙소. 춘분과 추분 무렵 남쪽바다 수평선 언저리에 남극노인성이 잠깐 비치긴 하지요. 지난봄 보리암에 올라 보았소이다만 정명(正命)하는 복이 내게 있을까 싶소.”

 정안이 뜰을 거닐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남쪽 하늘이 아니라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빛나는 북쪽 하늘이었다.

 “낙향하여 복 짓는 일에만 매진하시거늘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천수를 다하실 겁니다.”

 나도 덕담을 했다.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허허. 산 아래 바람 불면 고(蠱)괘가 되던가요? 음식 쟁반 위에 벌레가 가득한 고괘 말이오.”

 정안은 『주역』 18번째 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의 형국이 고괘와 같았다. 밖에서 들어온 도적들과 안에서 생긴 벌레들이 강토의 정기와 백성의 피를 빨았다.

 “일연 선사, 그리고 지밀 승정!”

 정안이 정색으로 우리를 불렀다. 일연과 내가 대답하며 별빛 서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북두칠성을 향해 있었다.

 “이 집을 절집으로 바꿀 생각이오. 남해와 하동 일대의 토지들도 죄다 내놓을까 하오.”

 “어르신!”

 “일연 선사께서 맡아주시오. 절집 구색이 갖춰지는 대로 노모를 모시고 오시오. 늦어도 내년 정초부터는 절집으로 거듭날 거요. 지밀 승정! 모쪼록 일연 선사를 도와주시오. 이 늙은이의 깊은 뜻을 헤아려 대장경 판각 불사에 차질이 없도록 말씀이오. 대장경을 완벽하게 새기는 건 우리 문명국 고려의 자존심이오. 야만의 시절을 당해 추하게 살다 가는 이 정안의 필생 사업이기도 하고요. 역시 오래오래 남고 길이길이 기억되는 건 진리의 말씀이라오.”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는 정안의 의지는 북극성처럼 분명했다. 인보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별실로 돌아온 나는 자리에 누웠다. 강도 진양부 최이 집정과 최항 지주사가 생각났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도 주지육림에 빠져 지내리라.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진탕 즐기리라. 세상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하다. 이 멀고 먼 변방 사람이 아니라 강도의 실권자인 그들 부자가 탐욕을 버린다면 나라가 얼마나 편안해질까.

 “뭐라! 무엇이 어쨌다고?”

 새벽잠을 자른 건 천둥소리 같은 정안의 성화였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니, 남해현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 간밤 판당에 도둑이 들어 주요 경전 경판들을 털어갔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정안이 손수 판하본을 쓴 『묘법연화경』 경판도 포함돼 있었다. 보승군(保勝軍)을 이끄는 중장군이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나와 인보, 일연은 정안과 가솔들을 따라 판당으로 달려갔다. 어젯밤 연회장에서 폭음한 수령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중장군은 병사들을 섬 구석구석에 풀어 흔적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어제 대마도 상선이 관음포를 거쳐 나루터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왔다고요?”

 눈초리가 찢겨 올라간 중장군이 나를 다그쳤다.

 “그렇소만.”

 “그놈들 짓이 틀림없소. 왜놈 장사꾼들이 제일 탐내는 게 고려국 경전이니까.”

 중장군이 단언했다.

 “그럴 리가요. 가네야마 강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지혜롭게 늙어가는 바다의 현자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인보가 나섰다.

 “그자들 짓이 분명해요. 함부로 굴러먹은 뱃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소.”

 “인보, 구업 짓지 마라! 가네야마 강수는 고려 조정과 대마도 도독에게 인가받은 국제무역상이오. 좀도둑이 아니란 말씀이오.”

 나는 인보를 다그치고 중장군을 설득했다.

 “대장경 경판을 도둑질해갔는데 좀도둑이라 할 수 있소? 아시다시피 고려국 국책사업 아니오? 얼마든지 대마도 도독의 지령을 받고 빼내갈 수 있는 거요.”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어서 추격선을 붙여보시오!”

 내가 외쳤다.

 “중장군, 비란리 포구 쪽으로 가보세. 어서 말을 대령하라!”

 정안이 눈을 부라렸다. 집사가 말을 몰고 오자 정안이 훌쩍 뛰어올라 박차를 가했다. 나도 달렸다. 갑신 목에서 쇳물 냄새가 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무지한 북쪽 오랑캐 몽골군 놈들은 대장경 경판을 불 지르고 미개한 남쪽 섬나라 왜놈들은 어렵사리 새겨놓은 경판을 훔쳐갔다. 고려는 안팎으로 온통 도둑놈들 소굴이 아닌가. 어젯밤, 산 아래 바람 불면 음식 쟁반 위에 벌레가 가득하다고 했던 정안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가네야마가 경판을 훔쳐간 걸까.

김종록 소설가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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