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급 '허들 공주' 깁스한채 "한판붙자, 그런데 비, 이수근 앞에서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혜림은 이날 오전훈련을 마치자마자 취재진을 만났다. “화장도 못하고 나왔다”고 했지만 땀흘려 연습한 후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15일 오후 2시 태릉선수촌 앞. 호리호리한 몸매, 학 같은 긴 다리, 연예인처럼 작고 오목조목한 달걀형 얼굴의 한 선수가 우산을 쓰고 걸어왔다. 물 안개 낀 빗 속에 그녀가 얼굴을 드러냈을 때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겨 퀸 김연아, 체조 요정 손연재라는데, 여자가 보기에도 진짜 스포츠 얼짱은 그녀였다. 스타가 아니어서 더 신선했다. ‘여신’급 선수였다. 한국 여자 허틀 100m 대표선수 정혜림(25)이다. 닉네임은 ‘허들 공주’. 김연아나 손연재 얘기 끝에 '진짜 얼짱 선수가 누군지 알아?'라는 의문 부호를 붙이는 네티즌들이 지목하는 진짜 얼짱은 바로 그녀였다.

외모 못지 않게 그의 실력은 아시아 정상권이다. 지난 10일 끝난 2011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초반부터 무서운 스피드로 전력 질주한 그는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육상 종목은 보통 20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는다고 한다. 정혜림은 아직 20대 중반이다(외모는 20대 초반 같다). 앞으로 갱신할 기록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곱상한 얼굴과 달리 그녀는 털털한 임꺽정 같았다. 기자도 답을 듣는 동안 움찔움찔했다.

정혜림은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참가권을 획득했다. 대회 개최국의 프리미엄이 아니라 성적으로 출전권을 따냈다. 앞으로 40여 일, 큰 대회를 앞두고 있다. 혹시 그의 훈련에 방해가 될까 염려했지만 그는 “대구 대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은메달을 땄다. 본인 최고의 성적이다.
“메달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다. 내 기록을 깨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예선을 치렀는데 좋은 감이 왔다. 원래 초조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다. 출발선에 섰을 때의 설렘, 완주했을 때의 성취감만 생각했다. 메달을 딴 것보다 더 기쁜 건 개인 기록을 깼다는 것과 자력으로 세계육상선수권 출전권을 따냈다는 것이다.”

정혜림은 쑨야웨이(중국ㆍ13초04)에 이어 13초11을 기록, 2위를 했다. 이 기록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선수권대회엔 각 국이 허들 A기준기록(12초96)을 통과한 선수를 3명까지 출전시킬 수 있다. B기준기록(13초15) 통과자는 1명만 내보낼 수 있다.
한국은 개최국이기 때문에 기준기록을 통과하지 못해도 종목별로 1명씩을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제 기준 B기록을 통과해 스스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정혜림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자격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설 예정이었던 이연경(31ㆍ문경시청) 을 제쳤다.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이연경이 이 기록을 깨지 못하면 태극마크는 그의 것이 된다.

정혜림의 미니홈피

-정 선수는 언제부터 육상을 꿈꿨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처음부터 육상 선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달리는 게 좋았다. 남자 아이들과 쉬는 시간에 ‘한판 붙자’며 시합을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첫 대회 8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다른 대회에 나갔는데 그 땐 팔에 깁스를 하고 뛰었다. 또 1등을 했다. 이 때부터 ‘육상이 내 길이다’라고 생각하고 뛰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나? (그의 현재 키는 169cm다.)
“초등학생 땐 앞에서 항상 두 번째였다. 그래서 스피드가 중요한 멀리뛰기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 키가 쑥 자랐다. 한 선배가 허들을 뛰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나도 뛰어봤다. 장애물을 넘는 그 기분, 아주 스릴있었다. 그 때 허들로 종목을 바꿨다.”

중ㆍ고등학생 때 각종 대회에서 활약을 펼쳤던 그는 2006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육상대회에 도전했다. 한국 여자육상 사상 최초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높았다.

-첫 세계 대회에 참가했는데 당시 기억은 어떤가.
“준결승에서 14초12로 조 6위에 그쳤다.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다는 데 큰 의의를 뒀다. 앞으로 이런 대회에 많이 참가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공주'는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 때를 회상하는 정혜림은 약간 위축된 모습이다. 분위기를 바꿔 육상 선수가 아닌 20대 아가씨의 정혜림을 물었다. 한창 연애할 때 아닌가.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었는데 “노코멘트하겠다”며 웃어넘겼다. 외모에 상당히 신경 쓸 나이이기도 했다. 그는 “운동할 땐 선크림만 바르는데 주말에 친구들을 만날 땐 신경을 좀 쓴다”고 말했다.(기자를 만나는데 맨얼굴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참 예뻤다.)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선 “가수 비”라고 했다. “열심히 무언가에 항상 새롭게 도전하는 열정이 좋다”고 덧붙였다. 쉴 때는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엔 “영화와 드라마를 자주 보는데 요즘은 최근 종영한 ‘최고의 사랑’과 한창 인기리에 방송되는 ‘시티헌터’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또 “주말엔 예능프로그램 ‘1박2일’을 챙겨 보는데 개그맨 이수근씨가 재미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영락없는 20대였다.

-징크스나 특이한 버릇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같은데.
“경기 전 몸 풀 때 음악을 들으며 신나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출발선에 섰을 때의 설렘을 떠올린다. 내게 있어 경기장의 출발선은 즐거움 그 자체다. 징크스는 아니지만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지난해 홍콩에서 열린 동아시아경기대회 때의 일이다. 옆 라인의 한 선수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못할 것 같은데 저 선수보다는 잘 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수는 좋은 성적을 내고 나는 탈락했다. 경기 후 화장실에서 많이 울었다. 그동안의 내 노력을 믿지 않고 다른 선수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부턴 절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를 이기자’는 주문을 외운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임하는 각오는 어떤가.
“경기에 나갈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흥분된다. 그것도 한국 땅에서. 12초대 진입을 달성하고 싶다. 현재 한국 최고 기록은 13초00이다. 지금 상태로 봐선 전혀 못 깰 기록도 아니다. 내 장점은 탄력과 스피드에 있다. 단, 기록을 단축하려면 허들에 닿지 않으면서 최대한 바짝 붙어 낮게 점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세를 가다듬는 훈련을 하고 있다. 다가올 대회, 2012 런던올림픽,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점점 기록을 단축시키는 내 모습을 보고 싶다.”

-육상 선수로서 국민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대구 대회는 그냥 대회가 아니라, 선진국만 개최하던 축제다. 우리가 그걸 개최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육상이 이런 매력이 있구나’라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육상은 안돼’ ‘육상은 비인기 종목이니 기대도 안한다’고 말하면 선수들은 큰 상처를 받는다.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눈여겨 봐주시면 그 선수 경기를 한층 더 재밌게 보실 수 있다. 선수들은 국민의 응원으로 성장해간다. 많은 애정의 눈길을 부탁드린다.”

글ㆍ사진=이지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