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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발 굵기 10만 분의 1 다루는 神技, 신산업혁명 이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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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11면

인류가 나노의 극미시(極微視)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나노미터(nm)란 10억 분의 1m, 1나노미터(nm)는 머리카락 10만 분의 1 크기다.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리처드 파인먼 교수는 한 강연회에서 “아주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원자를 우리 마음대로 배열해 기계를 만드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30년 뒤인 90년 미국 IBM 연구진이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이란 장치로 35개의 크세논 원자를 정확하게 배열, 5nm 높이로 회사 이름 ‘IBM’을 만들었다. 원자를 손으로 만지듯 다루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노기술 적용 분야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넓다. ▶기존 정보기술(IT) 소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나노 기반 소자기술 ▶의료 분야에 활용하는 나노 바이오 기술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고, 다양한 에너지원을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에너지·환경기술 ▶나노 크기에서 기존 재료를 조합하거나 새로운 물질 구조를 합성하는 나노소재 기술 등이다. 나노 연구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아직은 산업적으로 탄소나노튜브ㆍ그래핀 등 나노 물질과 나노급 집적회로를 만드는 수준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나노로봇, 초고효율 태양전지,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우주 엘리베이터 등 공상과학(SF) 같은 세계를 꿈꾸고 있다.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은 앞다퉈 나노공학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육성한다.

중앙SUNDAY 창간 4주년 기획 10년 후 세상 <15> 나노공학

기술 선두 미국, 지난해 16억 달러 투입
전 세계 나노기술을 이끌어가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 정부는 나노 연구에 지난 한 해에만 16억 달러(약 1조7000억원)가 넘는 예산을 투자하는 등 지난 10년간 119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2000년 1월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국가나노기술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나노기술은 트랜지스터와 인터넷이 정보시대를 개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21세기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이 분야를 선도하는 곳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IBM이다. 81년 IBM 취리히 연구소의 게르트 비니히와 하인리히 로러가 원자 크기의 100분의 1의 해상도를 보여주고 원자 입자를 조작할 수 있는 주사형 터널 현미경(STM)을 개발했다. 두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기자는 지난 5월 중순 뉴욕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IBM 왓슨연구소를 찾았다. 요크타운 하이츠를 가로지르는 134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니 오른쪽 숲 속 언덕에 400m쯤 되는 초승달 모양의 남색 유리벽 건물이 나타났다. 미국·스위스 등 6개국, 8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IBM 연구소들을 총괄하는 본부 같은 곳이다. 대만 출신의 유밍린 박사를 만났다. 그는 꿈의 나노소재라 불리는 그래핀을 이용한 전자회로를 연구한다. 그래핀이란 탄소 원자 한 개 두께의 2차원 탄소판이다. 전기를 전달하는 ‘전도성’이 구리의 100배 이상이다. 얇은 두께에 투명하며, 신축성이 뛰어나 휘거나 접을 수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그래핀은 모니터와 초고속 집적회로(IC) 제품의 소재로 각광받는다.

린 박사는 “그래핀의 이런 성질을 이용하면 기존 전자제품보다 가볍고, 작고, 빠르고, 전기를 덜 먹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며 “지금은 실리콘 반도체들을 연결하는 회로에 그래핀을 이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그래핀은 2015년께 시장 형성기를 거친 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춰 대형 업체 중심으로 시장 규모가 불어날 전망이다. IBM은 뉴욕 왓슨연구소의 고성능 그래핀 직접회로 연구뿐 아니라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알마덴 연구소의 수퍼박테리아를 잡아먹는 나노입자, 스위스 취리히 연구소의 나노 인쇄기술, 나노미터 메모리 등 ‘분업형 연구’를 펼치고 있다.

한국도 나노 연구엔 국력 이상의 저력을 보이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한국의 나노 연구가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4위라고 분석한다. 1위인 미국의 75% 수준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지난 4월 ‘제3기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발표했다. 체계적인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해 2020년께 미국 대비 기술 수준을 9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융합 및 녹색산업 등 산업파급효과가 큰 나노융합 원천기술을 30개 이상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2.25% 수준인 나노기술 분야 정부투자 비율도 2020년까지 4% 수준(8000억원)으로 높아진다.

세계 수준의 연구성과도 가시화되고 있다. 성균관대 홍병희 교수는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그래핀을 이용해 최대 30인치의 그래핀 투명전극을 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3.5인치 터치패널을 발표했다. 홍 교수는 “10여 년 뒤에는 둘둘 말거나 접어서 가방에 넣을 수 있는 투명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노 물질, 인류 존재 위협할 수도
포스텍(포항공대) 김광수 교수(화학과)는 2009년 머리카락 굵기보다 수백 배 작은 나노렌즈를 합성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김 교수의 나노렌즈로는 광학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200nm 크기의 세계를 사람 눈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올해 초 미국 MIT에서 경원대로 자리를 옮긴 한재희 교수는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태양전지를 개발 중이다. 한 교수는 5년 안에 변환효율 40%에 이르는 시제품을 개발하고, 10년 안에 상용화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한 교수의 연구가 착착 진행되면 2020년대엔 에너지 문제,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 지구온난화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될 전망이다. 이 밖에도 세포 내의 화학물질 정보를 영상화해 전송하는 ‘나노인공위성’(서강대 강태욱 교수), 바이오ㆍ나노기술을 융합한 고출력 리튬 2차전지(KAIST 강기석 교수) 등도 주목받는다.

지식경제부 나노 분야 R&D를 총괄하는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의 최영진 나노융합PD는 “10년 후쯤엔 나노기술이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게 될 것”이라며 “암과 같은 난치병을 조기 진단하고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나노폭탄, 스마트폰에서 진화한 입는(wearable) PC, 나노기술을 적용한 공기·물 필터, 태양전지 등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먼 얘기지만 나노공학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먼저 ‘기술 낙관론’을 살펴보자. 미국 미래학자 겸 발명가 레이 커즈와일은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지금의 과학발전 속도대로라면 2020년께 전자기술 대부분, 기계기술 중 다수가 나노기술 영역에 들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나노공학을 이용하면 인류가 필요한 거의 모든 물리적 제품을 생산해 낼 수 있으며, 굶주림과 환경오염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나노공학을 현대적 연구 분야로 정립한 에릭 드렉슬러는 저서 『창조의 엔진(Engine of Creation·1986)』에서 나노공학이 가져올 ‘축복’과 함께 ‘재앙’의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최초의 ‘어셈블러’(assemblerㆍ분자 조립자)가 모습을 나타낼 때 비로소 나노기술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될 것”이라며 “어셈블러는 원자 하나하나까지 조립할 수 있으므로 거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장밋빛 미래예측의 근거가 되는 주장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셈블러가 어떤 물건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셈블러 자신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즉 생물체의 세포처럼 자기증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것이 일단 증식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개체 수가 급증할 수 있다. 그는 이런 나노로봇이 지구 전체를 뒤덮게 되는 상태인 ‘잿빛 덩어리(grey goo)’를 언급하며, 이때가 되면 인류는 최후의 날을 맞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할리우드 공상과학(SF)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2008)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는 말이다.

하지만 최영진 PD는 “드렉슬러의 ‘어셈블러 위협론’은 아직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라며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먼지보다 작은 나노물질이 자연환경이나 인체에 노출될 경우 생태계를 교란하고 인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위험성”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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