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청진인쇄, 입술연지함 "크리스찬 디오르 도용" 승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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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의 부도덕함을 알리기 위해 힘든 싸움인 줄 알면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

8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청진인쇄' 공장. 연간 매출액이 10억원대인 회사가 법정에서 세계적인 화장품업체인 크리스찬 디오르를 꺾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병돈(兪炳敦.44)사장은 "소송 과정에서 몇 번이나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고 말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라 승리를 크게 기대하지 않던 30여명의 종업원들도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서울지법 민사합의50부는 이날 "자신들이 개발한 립스틱 용기 디자인을 크리스찬 디오르가 모방했다" 며 청진인쇄가 낸 의장권 침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에 따라 크리스찬 디오르측은 관련 제품을 시장에 내놓지 못하게 됐으며, 판매 중인 제품도 모두 회수해야 한다.

1978년 인쇄업으로 시작, 90년 들어 플라스틱 표면 가공업도 함께 하던 청진인쇄는 97년말 화장품용기 개발을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가 들어서면서 극심한 매출 부진에 허덕이던 兪씨는 립스틱 용기 개발을 불황의 돌파구로 결정한 것이다.

1억원 이상을 개발에 쏟아부은 끝에 98년 10월 다섯가지 색깔의 립스틱을 기분과 상황에 맞게 골라 쓸 수 있는 '타워형 입술연지함' 을 개발할 수 있었다. 젊은 여성을 사로잡기 위해 수십차례 시장조사를 했고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형태도 여러번 변경했다.

兪씨는 지난해 1월 특허청에 의장등록을 마친 뒤 크리스찬 디오르에 샘플을 보내 제휴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뚜렷한 이유없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兪씨는 4개월 전쯤 한 백화점에 들렀다가 자신이 개발한 것과 거의 같은 립스틱 용기가 크리스찬 디오르 상호를 달고 판매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당했던 兪씨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프랑스 본사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한편 서울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크리스찬 디오르측은 국내 로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대만 등에서 유사한 제품이 공개돼 있는 만큼 독특한 창작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며 맞섰다.

그러나 법원은 "제품 일부가 다른 점도 있지만 전체적 구조.기능 등을 볼 때 명백한 유사성이 인정된다" 며 "크리스찬 디오르측은 제품을 생산.판매 또는 광고해서는 안된다" 고 결정했다.

크리스찬 디오르측의 변호인측은 이에 대해 "지난 1월 특허심판원에 의장등록 무효심판을 청구한 만큼 이에 대한 법적 판단을 지켜보겠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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