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잇단 수난, 공공 패륜? 세대충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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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01면

1일 오전 11시쯤 서울 건대입구역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 안. 문이 열리자 70대 할머니 한 분이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평상복 차림인 할머니는 오른손에 봇짐 하나를 들었다. 걷는 게 힘겨워 보였지만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할머니 앞에 앉아 있던 20~30대 승객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거나, 태블릿PC를 통해 TV프로그램을 시청하느라 바빴다. 보다 못한 40대 여성이 일어서며 “할머니 이쪽으로 앉으세요”라고 권했다. 할머니는 “이거 미안하게 됐다”고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 이런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는 승객 유은원(40)씨는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편하자고, 아니면 자신이 먼저 앉았다는 이유로 양보하지 않는 게 두드러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600만 명의 발’ 지하철 공간에서 벌어지는 갈등

서울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의 민원게시판에는 이런 글도 올라왔다. ‘5호선을 탔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힘겹게 서있는데도 젊은 사람 누구도 자리 양보를 안 했다. 결국 좀 젊은(?) 할아버지들이 노약자석을 양보했다. 나의 자리는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글을 쓴 사람은 임신 32주차 예비 엄마였다.

지하철에서 젊은 층과 노인들의 충돌이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패륜녀’ ‘막말남’으로 불리는 인터넷 영상물 속 주인공들이다. 일부 젊은이는 노인들에게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노인들 사이에서는 ‘공공 패륜(공공규범·전통예절의 붕괴 현상)’이 만연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른 공경’ ‘노인에게 자리 양보’ ‘타인 배려’ 같은 공중 예절과 규범이 깨지는 현상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특히 지하철 좌석을 두고 벌어지는 노인과 청년층의 충돌은 세대갈등으로 번질 기세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 맞서 몇 안 되는 노약자석이라도 사수하려는 노인들 도 적지 않다.

이런 사태는 1980~9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나타난 ‘경로(敬老) 패러다임 붕괴현상’은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공론장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됐다. 30대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만진 60대 할머니를 때렸던 ‘지하철 페트병녀’ 사건을 중재했던 혜화역의 박범순(55) 부역장은 “80~90년대엔 노인이 타면 다들 자리를 양보한다고 일어서기 바빴는데, 이제는 노약자석을 뺀 나머지는 젊은이 좌석이라고 생각해 아예 양보를 안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몇 년 새 예의범절과 수치심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주장했다. 7호선 건대입구역 이경호(51) 역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노인들을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는데, 스마트폰 때문에 최근 공론화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지하철은 수도권에서만 하루 평균 6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이용한다. 그런 지하철 공간의 특성 때문에 남녀노소, 세대, 계층 간의 접촉 기회가 많다. 게다가 노령화로 인해 지하철을 타는 노인인구 역시 급증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04년 10% 선이었던 무임승차(만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 비율은 2005년 10.9%, 2007년 12.3%, 2009년 12.6%로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

이나미(심리학) 박사는 “일반 생활 속에서 노인과 젊은 층이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며 접촉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지하철은 이들이 불가피하게 접촉하는 공간이어서 갈등과 충돌의 여지가 항상 있다”고 말한다. 이 박사는 또 “노인들이 너무 권위적으로 소통하려는 반면 젊은 세대들은 탈권위와 디지털 소통에 익숙해 면대면 접촉에서 다른 세대와 소통하는 데 서투르다”고 지적했다.
노인·청년 사이 충돌 중에서도 노약자석 자리다툼으로 인한 민원건수가 크게 늘고 있다. 노약자석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층이 “왜 노약자석에 앉아 있느냐”고 따지는 노인들과 말다툼을 벌이다 생기는 민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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