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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확산, 분노의 역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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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도쿄 특파원

#1 지난 주말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沖繩)로 출장을 다녀왔다. 섬 남부의 나하(那覇)공항에 내려 렌터카로 고속도로에 접어든 순간 깜짝 놀랐다. 주말인데도 차량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섬 북부 교다(許田)인터체인지까지 50여㎞를 달리는 동안 너무 한가해 ‘무슨 일 났나’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궁금증은 고속도로 출구에 적혀 있는 팻말을 보는 순간 절로 풀렸다. ‘고속도로 무료화 6월 20일로 완료. 유료로 전환됐습니다.’ 그래서인지 국도는 정반대였다. 니시하라(西原)인터체인지에서 빠져 3㎞ 남짓 가는 데 30분 넘게 소요됐다. 현지 호텔 관계자는 핏대를 세웠다. 민주당이 고속도로를 무료화한다는 말에 혹해서 찍어줬더니 집권하고 나니까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는 것이다. 고속도로뿐 아니다. 어린 자녀를 지닌 일본 국민은 조만간 또 한번 핏대를 세우게 됐다. 민주당이 집권공약으로 내세웠던 ‘어린이 수당’이 올 10월부터 사실상 폐지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2년 전 선거공약으로 “15세 이하 자녀에게 한 달에 2만6000엔(약 35만원)씩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집권 후 1만3000엔으로 줄이더니 이제는 소득제한도 두고 금액도 1만 엔 이하로 줄인단다. 기존 부양공제가 폐지된 것을 감안하면 전에 비해 손에 들어오는 돈이 마이너스가 되는 세대도 생긴다. 고등학교 교육무료화 정책도 상황은 비슷하다. “민주당의 ‘복지 사기’에 속았다”는 일 국민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다.

 #2 분노의 확산-. 사흘 전 일본을 방문한 손학규 대표가 특파원 간담회에서 반복해 썼던 표현이다. 반값 대학등록금, 보육료 무상화, 무료 급식 등의 복지 문제를 설명하면서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 ‘기본권리를 똑같이 누리고 똑같이 혜택을 봐야 한다’는 국민의 분노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보편적 복지’다. 의료보험 제외대상이던 5000만 명에게 혜택을 돌리겠다고 한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 생활복지 공약을 내건 일본 민주당이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 그런 시대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한나라당마저 요즘 복지 논쟁에 적극 가세한 걸 보면 손 대표 말대로 복지가 시대적 흐름은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손 대표가 언급한 일본의 경우는 구체적 청사진 없는 복지가 얼마나 위험한가도 동시에 보여준다. 재원마련 방안도 뚜렷이 없는 상황에서 일 민주당이 “세금 안 올려도 예산 군더더기를 치면 복지 공약을 이룰 수 있다”고 했던 장담은 기만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노의 역류’였다. 성난 민심은 간 나오토 정권을 떠났다.

 사람 심리는 오묘하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르지만 ‘준다고 해놓고 안 줄 때’ 내지는 ‘주다가 안 줄 때’ 인간은 강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분노의 역류’는 ‘분노의 확산’보다 몇 배나 더 빠르고 무섭다. 되돌이킬 수도 없다. ‘잘 준비된 복지’의 필요성을 손 대표가 일본에서 깨닫고 갔으리라 믿는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