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주유소 기름 떨어져 다른 곳서 겨우 넣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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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서울 성수동의 한 주유소에 세워져 있는 입간판 뒷면. 전날인 23일 오후 소비자들에게 공급 부족으로 경유 주유가 불가능한 상황을 알리고자 써 붙였던 공지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은화 기자]


‘경유 주유 안 됨. 죄송합니다’.

 24일 오후 1시 서울 성수동의 GS칼텍스 직영 셀프 주유소 입간판 뒷면에 붙어 있는 글귀다. 23일 오후 이곳은 기름이 떨어져 아예 문을 닫았었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 입구마다 노끈으로 펜스까지 쳤다고 한다. 24일 아침에야 휘발유·경유 물량을 약간 받아 판매를 재개할 수 있었다. 한 직원은 “‘주유 안 됨’이라는 글귀는 또 기름이 떨어질 경우 고객에게 즉시 알리기 위해 아예 치우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직원은 “아침에 들어온 양이 턱없이 부족해 언제 다시 기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셀프 주유소인 이곳은 주변 주유소보다 값이 싼 데다 이날은 물량까지 평소보다 적어 기름이 더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달 7일 0시부터 정유사들이 지난 4월 L당 100원 내렸던 휘발유·경유 값이 원상 복귀된다. 이를 앞두고 주유소에 기름이 바닥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주유소들이 사재기에 들어가서다. 정유사들이 싸게 줄 때 쟁여놓자는 속셈이다. 이 같은 사재기 수요 때문에 정유사에 재고가 뚝 떨어져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직장인 김진석(33)씨는 “기름을 넣으러 서울 강남의 집 근처 주유소에 갔다가 기름이 없어 안 판다는 이야길 듣고 황급히 다른 주유소를 찾아 겨우 넣었다”고 말했다.

 공급량이 부족하다 보니 아예 덜 팔려고 값을 올린 주유소도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S주유소는 이날 경유 값을 L당 1825원으로 올렸다. 인근 주유소보다 L당 100원 이상 비싸다. 이 주유소 직원은 “비싸서 덜 팔리는 게 물량이 떨어져 못 파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역삼동의 K주유소 사장은 “전시 상황도 아닌데 기름이 부족해 정유사가 최근 ‘배급제’를 하고 있다”며 “반나절 팔다가 기름이 떨어지기 일쑤”라고 말했다. 자영 주유소인 이곳은 하루에 경유·휘발유 합쳐 350~400드럼(1드럼당 200L)을 판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판매량의 3분의 1 수준인 100~150드럼 정도만 공급 받고 있다.

 공급 사정이 상대적으로 더 안 좋은 건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다. SK이노베이션은 주유소에 싸게 공급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카드 청구서가 날아갈 때 100원씩 깎아주는 식이다. 기름값을 환원해도 주유소 입장에서는 달라질 게 없다. 그러니 사재기를 할 이유도 없다. 에쓰오일은 국내 주유소가 많지 않아 부담이 작다.

 GS칼텍스는 최근 여수 공장 일부 설비에서 이상이 발견돼 2주가량 가동을 멈추기도 했다. 주로 경유 생산과 관련된 설비였다. 그렇잖아도 재고가 거의 떨어진 마당이라 경유 부족 현상이 심해졌다. 가동 중단에 따른 생산 차질은 80만 배럴에 이른다. 국내 하루 소비량의 약 40%에 해당하는 양이다. GS칼텍스 측은 “26일부터는 정부로부터 빌린 비축유 87만 배럴을 전국에 풀 수 있어 공급난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휘발유·경유 가격을 L당 100원씩 내리는 바람에 팔수록 손해를 보게 된 정유사들이 일부러 공급을 줄여 문제가 생겼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 주유소 관계자는 “보통 기름이 부족하면 사정이 괜찮은 다른 정유사로부터 기름을 빌려 수급량을 맞추는 식의 ‘제품 교환’을 하는 게 정상인데 왜 안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글, 사진=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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