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21> US오픈 조 편성의 유머 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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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선수들은 부자다. 그래서 공화당 지지자가 많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골프코스에서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은 혼자 책임져야 하며 개인의 성공은 사회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선기금을 많이 내는 축에 들지만 강제로 내는 건(세금) 싫어한다.

14년 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골프 때문에 다친 일이 있다. 골프광으로 유명한 클린턴은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그레그 노먼의 집에 초대돼 갔다가 계단에서 발을 잘 못 디뎌 굴렀다.

그는 대통령 치료 임무가 있는 워싱턴 인근 베데스다 공군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고 목발을 짚고 다녔다. 당시 PGA 투어 선수 일부는 세금을 많이 걷으려 하는 민주당 대통령이 다친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중 앤드루 맥기라는 선수는 너무 나갔다. 당시 “내가 노먼이었다면 클린턴을 발로 차 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US오픈은 베데스다 병원 근처에 있는 콩그레셔널 골프장에서 열렸다. 역대 대통령 7명이 회원이었던 대통령의 골프장이라고 할 만하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US오픈에 속칭 얼간이 조(prick pairing)를 만드는 전통이 있다. 골프계에서 지탄 받는 선수나 USGA가 싫어하는 선수를 한 조에 몰아 넣는다. USGA는 이 조에 앤드루 맥기를 집어 넣었다. 투덜이로 알려진 스콧 호크, 마크 브룩스와 함께다. 맥기는 선수 시절 약간의 슬로플레이어인 것을 제외하고 평판은 좋았다. USGA는 백악관 근처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대통령에 심한 말을 한 맥기를 얼간이조에 넣어 골프팬들의 미소를 자아냈다.

US오픈의 조 편성에는 이런 위트가 있다. 일반 PGA 투어 대회에서는 거물 선수 눈치를 보느라 조 편성에 장난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메이저대회를 여는 USGA는 힘이 있다. 공식 챔피언 조(이전 연도 US오픈 챔피언과 디 오픈 챔피언, US 아마추어 우승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엿장수(USGA 전무이사) 마음대로다.

90년대 말 타이거 우즈와 리 웨스트우드, 톰 왓슨을 한데 묶은 일이 있다. 모두 성이 W로 시작된다. 이 조는 스탠퍼드대를 다닌 두 선수(톰 왓슨, 타이거 우즈)가 한데 어울리고, 당시 미국 최고 선수였던 우즈와 최고 유럽 선수였던 웨스트우드가 한 조에서 경쟁하는 재미있는 구도가 됐다.

너무 창의력을 발휘해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여자 US오픈에서 투병 경력이 있는 선수 3명을 한 조로 묶었다가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은 다음 US오픈 조 편성의 유머는 줄어드는 듯했는데 올 초 USGA 전무이사가 바뀌면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로리 매킬로이의 우승으로 끝난 2011년 US오픈에서도 국적, 과거의 경력, 패션 감각 등 다양한 변수를 찾아 조 편성을 했다. 토마 르베이, 그레고리 하브레이, 브라이언 게이 등 선수 이름의 운을 맞춘 조도 보인다.

올해 대회는 14년 전 맥기가 얼간이 조에 들어갔던 콩그레셔널 골프장에서 치러졌다. 올해 대통령에 대한 모독 발언은 없었지만 얼간이 조는 있었다. 로리 사바티니, 로버트 앨런비, 라이언 무어가 이 조 멤버로 보인다. 사바티니는 올 초 LA 오픈에서 공을 찾아주던 소년 자원봉사자에게 심한 욕설을 하고 이에 항의하는 동료 선수와도 마찰을 일으키는 등 트러블 메이커로 꼽히고 있다. 골프계에서는 사바티니를 얼간이 조에 넣은 USGA의 보이지 않는 징계에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이다.

US오픈 3라운드가 열린 18일 백악관 인근의 앤드루 공군 기지 골프 코스에서는 US오픈만큼 중요한 골프 게임이 치러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함께 라운드를 한 것이다. 각을 세우고 싸우던 오바마(O)와 베이너(B)가 한 조에서 경기한다면 OB가 날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날카롭게 대립했던 두 사람은 골프 코스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 홀에서는 한 팀으로 경기해 2달러를 땄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의 골프는 동지끼리의 친목 도모 수단이었는데 두 사람의 골프 회동은 백악관 역사상 최초의 정적과의 골프라고 평가된단다. USGA 못지않는 조 편성의 위트다.

성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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