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동국진체<東國眞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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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지리산 천은사(泉隱寺)가 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을 모신 매천사(梅泉祠)가 그 근처에 있다. 천은사의 원래 이름은 단 샘물이 있다는 뜻의 감로사(甘露寺)였다. 숙종 때 중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영조 때의 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지은 『천은사 중수상량문(泉隱寺重修上樑文)』이 남아 있다. 중수할 때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인 이후로 물이 말라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가 되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까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천은사에서 신필(神筆)로 알려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하자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주었다. 이 현판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이한 글씨체다. 이광사는 가객(歌客)의 노래가 우조(羽調)면 글씨도 우조고,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이면 글씨도 평조의 분위기가 담겼다고 전할 정도로 신기(神氣)가 담겨 있는 글을 썼다.

 이광사의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은 대사헌 이진검(李眞儉)이었으나 소론(少論) 강경파였기 때문에 노론(老論)에서 추대한 영조가 즉위한 후부터 집안이 몰락했다. 부친 이진검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에 죽고 말았다. 이광사 자신도 영조 31년(1755) 발생한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돼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살아나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자호(自號)를 ‘두만강 남쪽(斗滿江之南)’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짓고 학문과 글씨에 몰두했다. 이광사가 백하(白下) 윤순(尹淳)의 뒤를 이어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가문의 신산한 고초를 붓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이 오탈자와 심사비리 등으로 도마에 올랐다. 원(元)나라의 정표(鄭杓)는 『연극병주(衍極竝注)』에서 “오호라! 서도는 지극하도다. 군자는 반드시 지극한 경지를 쓴다고 했는데, 하물며 서도이겠는가?(嗚呼! 書道其至矣乎!君子無所不用其極,況書道乎!)”라고 말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