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42) 최무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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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의 유일하게 선배로 여겼던 최무룡이 주연한 TBC 일일드라마 ‘비밀’(1972). 최무룡(맨 오른쪽)이 사미자(왼쪽에서 두 번째)와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계 선배는 최무룡(1928~99년)이다. 그도 1970년대 들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밤무대에 섰다. 트위스트 김이 내게 백지수표를 내민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화계의 자존심인 최무룡이 밤무대에 서다니…. 내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최무룡은 착한 사람이었다. 나의 연기를 자상하게 지도해준 거의 유일한 선배였다. 극단 신협 출신인 그가 51년 피난지 대구에서 열연한 연극 햄릿 역은 두고두고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굴은 개성이 넘치고, 눈 연기에 관한 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상대 배우의 리액션도 잘 받아줬다.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데 탁월했다. ‘젊은 그들’(1955), ‘꿈은 사라지고’ ‘장마루촌의 이발사’ ‘비극은 없다’ ‘청춘극장’(1959), ‘남과 북’(1965) 등이 내가 꼽는 최무룡의 대표작이다. 재능이 넘치고, 연기 기초가 그렇게 단단한 사람은 드물었다.

 게다가 엄청난 달변이었다. 나는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 할까’라며 항상 감탄했다. 너무 말을 잘 하다 보니 언행일치가 잘 안 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잘 베풀면서도 후배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

 71년 명동 메트로호텔 부근 술집 ‘라 데 팡스’에서 최무룡이 밤무대에 선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뜯어말리고 싶었다. 나는 어느 날 라 데 팡스 객석 맨 앞 줄에 진을 치고 앉았다. 타고난 미성의 소유자인 최무룡의 노래는 역시나 달콤했다.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역시나 취객들이 “최무룡, 이리 와서 술 한 잔 받아라”라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마치고 들어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앙코르, 앙코르!”

 눈물이 살짝 맺혔다. 그 누구도 모르게 역설적으로 항변을 한 셈이었다. 밤무대는 1년 단위로 출연 계약을 했다. 이론적으로 365일 출연하면 계약에서 풀려나게 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개인 사정으로 하루 펑크를 내면 거기에 하루를 더 붙여 이틀을 서야 했다. 일년 계약하고서 기간 내에 끝나는 사람은 없었다. 업자들은 1년 계약하고 2~3년 간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빼기 힘든 곳이 밤무대였다.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최무룡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더니 황급히 사라졌다. 보통 손님이 찾으면 밤무대 가수는 인사를 하는 법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술집부장을 찾아 “최무룡씨 왜 안 나오나”라고 물었다. 부장은 “가셨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최무룡은 76년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어려운 생활을 했다.

 지난해 늦가을, 꿈에 최무룡이 두 차례 나타났다. 그는 빛나는 후광을 등에 지고,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옷은 화려하게 빛났고, 얼굴이 선명하게 맑게 보였다. 내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술 사라.”

 부산의 유명한 도인의 조언을 받아 부산 범어사에서 최무룡 천도재를 지냈다. 사재를 털어 바라춤·살풀이춤에서부터 연춤까지 판을 크게 벌였다. 최무룡 선배, 하늘에서 편안하시길….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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