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 '위기의 계절'] 속병드는 상장사 실태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1만3천원을 넘던 주가가 액면가 이하(22일 종가 3천2백40원)로 떨어진 코오롱상사는 '인터넷 벤처회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주가가 반등할지 모른다' 는 기대를 안고 사무실을 테헤란 벨리로 옮겼다.

코오롱건설도 주가가 지난해 최고치의 4분의 1(22일 종가 2천3백55원)로 떨어지자 '지난해 말 나래이동통신 10만주를 사들여 1백억원의 투자이익을 냈다' 는 공시를 냈다.

코오롱의 이활용 전무는 "시중금리보다 높은 5% 이상의 현금배당을 발표했지만 주가하락을 막지 못했다" 며 "사상 최대의 흑자가 났는데도 주가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고 말했다.

거래소와 코스닥 시장의 극심한 주가 양극화를 바라보는 거래소 상장기업의 위기의식은 절박하다.

한솔그룹은 정보통신 분야의 해외시장 개척을 당분간 보류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한솔은 올해 유상증자로 5천억원을 확보해 중국시장에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거래소 시장의 침체로 증자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 최재후 상무는 "거래소 상장 제조업체의 자금 조달에 빨간 불이 켜졌다" 고 말했다.

상장사 가운데 주가가 액면가 이하로 떨어진 2백54개 업체는 물론 삼성전자.SK텔레콤 등 일부 초우량기업을 제외하고는 유상증자는 엄두를 못내고 있다.

쌍용그룹의 경우 6개의 상장업체 주가가 모두 액면가 이하로 떨어진 상태. 현대중공업 권오갑 이사는 "적정 주가보다 50% 이상 하락한데다 다시 20% 정도의 할인율을 물고 주식을 바겐세일할 회사는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해외 주식예탁증서(DR)발행이나 외자유치 여건도 어려워지고 있다.

한빛은행 김상배 대기업여신팀장은 "제조업체들이 원활한 현금 흐름으로 당장은 버텨내고 있지만 앞으로가 문제" 라고 말했다.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회사채 발행과 금융기관 대출이 남아 있지만 이조차 여의치 않다.

씨엘투자자문의 윤수영 이사는 "대우채 파동 이후 기관투자가의 회사채 보유물량이 2백50조원 규모에서 지금은 1백50조원 정도로 줄었다" 며 "기업의 단기자금 공급줄인 50조~1백조원 정도의 서울 명동 사채시장 큰손들도 대부분 코스닥과 장외시장으로 옮겨갔다" 고 말했다.

유일하게 남은 창구인 금융기관의 대출도 정부가 총선 이후 금융긴축에 들어가면 어려워질 전망이다.

씨엘투자자문의 윤이사는 "영업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제조업체들은 하반기부터 자금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기업들이 한꺼번에 회사채 시장이나 금융기관에 몰릴 경우 금리가 빠르게 오를 수밖에 없다.

'제조업 왕따현상' 이 낳을 후유증을 걱정하는 시각도 많다. SK의 이노종 전무는 "제조업의 특성상 지금 투자해야 3년 뒤 과실을 거둘 수 있다" 며 "지나치게 빠른 제조업 공동화로 앞으로 수출과 고용이 적절하게 확보될지 걱정" 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자 거래소 상장 제조업체들이 주가관리에 나섰다. 현대중공업은 자사주 매입규모를 3천억원에서 5천억원으로 늘리고, 담배인삼공사도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을 검토하고 있다.

또 현대.삼성.한진중공업은 선박 수주를 둘러싼 경쟁관계를 접고 주가하락에 공동대응할 움직임이다.

조선 3사는▶한국 조선업계의 수주 1위▶호화 유람선과 드릴 십 등 고부가가치 선박수주 증가 등 향후 10년간 조선업계의 전망이 밝다는 점을 중점 부각하기로 했다.

한솔그룹 임원들은 한솔제지 주가가 폭락하자 자발적으로 1천만~3천만원씩을 들여 개인별로 자사주를 매입하기로 했다.

고명호 이사는 "저평가된 우리 회사의 주가는 우리가 지킨다는 상징적인 의미" 라고 설명했다.

코스닥과 거래소의 주가 양극화는 제조업체 종업원에게 박탈감과 무력감을 안겨주고 있다. 쌍용양회의 차장급은 지난해 유상증자 때 주당 5천원 선에서 5천주씩 우리사주를 받았는데 주가가 반토막 나면서 애물단지로 변했다.

직원들은 "급여가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은데다 우리사주의 평가손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고 말했다. 이 회사 이상찬 차장은 "코스닥 드림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고 말했다.

㈜효성의 직원들도 지난해 우리사주로 30%에 가까운 평가손이 발생했으며, 현대와 한진.금호도 사정은 비슷하다.

현대중공업의 우리사주는 아직 평가손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주가급락으로 종업원들의 불만이 커지자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4월 총선에서 지역구를 옮길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다.

H사의 한 임원은 "정부가 대기업에는 개혁을 강요하고 벤처기업은 집중 육성한 정책이 주가 양극화를 초래한 배경의 하나" 라며 "제조업체의 수출과 고용 효과에 대해 정부가 이제는 새롭게 평가해야 할 시점이 됐다" 고 주장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도 "기관투자가의 동일계열 회사채 보유한도제를 완화하고 대기업의 부채비율 제한도 신축적으로 조정, 금융불안을 사전에 예방할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이철호.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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