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반값 등록금도 아깝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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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참으로 딱하고 안타깝습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 말입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뻔뻔함은 양푼 밑구멍보다 더합니다. 포퓰리즘 탓에 불거진 치부를 다시 포퓰리즘으로 덮어 가리려 합니다. 표만 보이지 곪아가는 환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요. 대학들의 빤빤함 역시 덜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주인은 평생직장인 교수와 교직원이고 학생들은 잠깐 다녀가는 봉일 뿐입니다. 손님의 고민엔 관심이 있을 리 없고 주머니 속만 궁금할 따름이지요. 혹시나…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던 학생들의 분노는 또다시 촛불로 타오를 기세고, 자식 가진 죄인인 학부모들은 이것도 팔자려니 등록금과 노후대책을 맞바꿉니다.

 모두 얼음물에 담갔다 꺼낸 차가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도 찾기 어려운 해법입니다. 표 계산과 주판알 튕기기, 흥분과 체념으로 나올 리 만무하지요. 자, 여러분 먼저 차가워지십시오. 냄비처럼 다는 게 젊음의 특권은 아닙니다. 달면 달수록 찌그러지기 쉬운 겁니다. 남에게 분노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냉정해지십시오.

 반값 등록금은 정치언어지 현실언어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나라 곳간이 그리 넘치지도 않고, 국민 세금으로 등록금을 댄다면 빈사상태의 부실 대학들이나 환호할 일입니다. 이런 얘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데서 많이 하니 여기서는 다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반값요? 나는 그 반값도 아깝습니다. 반이면 작습니까? 반만 해도 일년이면 500만원이고 4년이면 2000만원입니다. 그걸 왜 대학에 갖다 바칩니까? 자신에게 냉정해지라고 했지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왜 대학에 다닙니까?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취업하기 어려우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외고 나오고 명문대 졸업하고도 서른 번 넘게 면접 보고 겨우 직장 얻는 게 벌써 10년 전 현실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졸자도 어려운데 고졸 자격으로 어떻게 취업을 하느냐고요? 그것도 틀리지 않은 얘깁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대졸이라면 뽑지 않을까 봐 고졸로 속이고 원서를 넣는 경우도 이미 드물지 않습니다. 대학 진학률 80% 시대가 낳은 웃지 못할 코미디입니다. 고졸자는 대졸 입사 동기에 비해 연봉도 적고 승진도 늦다지요. 그것 역시 반만 맞는 얘깁니다. 같은 대졸 동기 간에도 배 이상 연봉 차이가 나는 세상입니다. 같은 대졸로 같은 일을 하면서 연봉은 반밖에 못 받는 계약직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게 대학 문밖을 나서면 바로 만나게 될 현실입니다.

 고졸로는 번듯한 신랑·신붓감 찾기도 어렵다고요? 이런 소릴 들으면 화가 납니다. 그럼 고교 졸업한 날 그 상태로 계속 머물 겁니까? 남들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열심히 해서 뭔가 나만의 무기를 만들고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고졸이라 싫다는 사람은 배우자로 삼지 않는 게 앞날을 위해 낫습니다.

 현실을 몰라서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현실을 좇다가 현실에 속고 치이는 모습들이 딱해서 하는 말입니다. 현실이 그러니 어쨌단 말입니까? 기형인 현실을 좇아 얼마나 기형인 삶을 살겠다는 겁니까?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단단한 근육질의 사냥꾼들이었습니다. 강인한 피부는 추위에도 더 잘 견뎠고, 두개골은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컸으며, 현생인류보다 성능 좋은 창도 만들 줄 알았지요. 그런데도 지구의 주인 자리를 우리 조상들에게 빼앗긴 이유가 뭘까요?

 지나친 현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실 대처능력이 뛰어나니 굳이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보다 허약했던 우리 조상들은 여러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더 많은 모피가 필요한데 사냥술이 떨어지니 다른 곳에 눈을 돌려야 했지요. 이것저것 챙기던 것이 장신구로 발전했습니다. 장신구가 생존에 직접적 도움이 될 리 없지만 사고의 틀을 바꿔놓을 수 있었지요. 좇기 벅찬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상상력을 안겨준 겁니다.

 5000년 전 거대한 얼음공기가 유라시아 대륙을 덮쳤을 때 네안데르탈인은 쓰러졌지만 우리 조상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의 상상력은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움막을 창조했던 겁니다. 차가워지십시오. 왜 대학에 가는 건지, 다니는 건지 생각하십시오. 앞에서 든 이유들 탓이라면 반값도 아깝습니다.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다른 길을 찾으세요. 멀리 보고 움막을 준비하세요. 급격한 환경 변화가 멀지 않았습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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