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규제 완화, 백화점업계 부익부 빈익빈 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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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완화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세일규제 완화로 백화점업계와 입점업체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자율규제나 혹은 정치처럼 시민단체가 나서거나 아니면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든지…."?어느 백화점 임원의 하소연이다.

90년대 후반 규제완화의 바람속에서 우리 나라의 대형유통업체(백화점 등)와 제조업체 판매처(주유소 등)에 대한 세일규제가 97년에 풀렸다. 원래 백화점업계는 여러 경로로 세일규제 완화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각종 규제는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바람 속에서 그냥 풀려버렸다. 96년까지의 세일일수가 1년에 약 60일 내외였으나 97년 이후 현재까지 거의 모든 백화점이 1년에 약 2백일 이상을 세일행사(백화점 세일, 브랜드 세일 등)를 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상판매와 세일판매의 매출실적이 약 7대 3으로 정상판매시에 고객들이 몰렸으나, 현재는 비율이 거꾸로 3대 7로 변했다. 다시 말해 정상판매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경쟁세일은 원래 불가능

우리나라의 백화점은 북미와 유럽의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 백화점의 지하에는 식품매장이 있다. 미국에는 이러한 백화점은 단 한 군데도 없고, 유럽에는 서너 군데가 있다. 일본에서 유래해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한국과 대만에만 있는 형태이다. 지상 1층부터 5층까지의 여성, 아동, 남성의류와 패션은 전형적인 백화점 제품들이다. 그러나 그 위층의 가전, 문구와 각종 잡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형태이다. 선진국의 백화점 대부분이 1천평 미만인데 비해, 우리나라의 그것은 최소 수천평에서 큰 점포는 1만평이 훨씬 넘는다. 그것은 백화점이 아니라 쇼핑센터 그 자체이다. 미국의 쇼핑센터에는 1천평 미만의 백화점 서너 개와 1백평 미만의 전문점 수백 개 그리고 각종 문화시설이 포함돼 있다. 거의 전부 1층이나 2층 구조내에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수평적 쇼핑센터(horizontal shopping center)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의 백화점은 수직적 쇼핑센터(vertical shopping center)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점포들이 1만평이나 되는 8, 9층 규모의 백화점 속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백화점과 우리나라 백화점의 또 다른 차이는 매장형태이다. 선진국의 백화점은 전부 직영매장으로 구성돼 있으나 우리나라의 그것은 거의 대부분(식품매장을 제외한)이 임대매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선진국의 백화점은 직접 제품을 구입해 판매하나, 우리나라의 백화점은 그냥 장사할 업체들에 매장을 빌려준 부동산임대업이다. 왜 이러한 구조가 생겼을까?

20여년 전에 우리나라 백화점 업계에 스카우트된 어느 일본 유통인이 만든 구조이다. 그를 만났더니 필자에게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제조업 수준에 비해 백화점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각종 점포들을 임대로 유치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의 수출열기 때문에 각종 제조업체들에 각종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만든 우리나라 특유의 형태이다. 이 방식을 후발 백화점들이 완전히 모방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전체 백화점이 이 임대매장(특정매장으로 불림)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는 그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가끔 소비자들과 언론들이 불평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백화점들의 가격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각종 유통업체 자체로 가격을 책정하는 오픈프라이스 제도(open price system)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도 꽤 되었다. 수년 전의 화장품에서 시작, 작년 봄의 의약품 그리고 작년 가을의 의류와 가전으로 확산되었다. 오픈프라이스 제도란 제조업체가 제시하는 가격이 아니라 유통업체가 알아서 자체적으로 소비자에게 맞는 가격으로 판매를 해야 한다는 제도이다. 따라서 점포마다 가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 말 이후 현재까지 모든 백화점의 가전, 의류, 화장품매장의 가격이 동일하다고 소비자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언론도 그렇게 기사화한다.

그런데 그게 그럴 수밖에 없다. 한 제조업체 제품이 거의 모든 백화점에 똑 같이 입점돼 팔리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제품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백화점은 간판만 다르지 모두 동일한 업체들이 운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판매시의 가격이나 세일시의 가격이 백화점마다 동일해지는 것이다. 백화점간의 자체적인 가격경쟁은 원래 없다는 것이다.

바겐세일과 경품제한 규제가 풀리자 초대형백화점들이 깃발을 들었다. 고급승용차부터 아파트까지 경품액수가 초대형화됐다. 나머지 대부분의 백화점들도 비슷한 경품을 내걸었으나 워낙 구색에서 초대형백화점에 밀리게 되었다. 소비자들이 세일기간만 되면 자기가 다니던 백화점을 버리고, 시내 중심가의 초대형백화점으로 몰렸다. 그 결과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제살 깎아먹는 세일은 이제 그만

초대형백화점과 나머지 백화점으로 완전히 판이 갈라섰다. 두 개의 초대형백화점은 IMF 이전인 97년의 매출에 비해 지난해엔 서울에서 36.3%와 25.5%가 각각 신장됐다. 이 두 개의 백화점은 부산에서도 각기 32.2%와 18.4%의 매출이 신장됐다. 그 외의 대한민국 모든 백화점은 적게는 5.6%에서 많게는 35.4%까지의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일과 경품은 기존 백화점들을 부익부 집단(두 개의 백화점체인)과 빈익빈 집단(서너 개의 백화점체인과 사십여 개의 백화점)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져 2∼3년 내에 빈익빈 집단에 속하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백화점들이 도산할 것이다. 필자가 백화점업체들의 각종 공식, 비공식 자료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5년 이내에 많으면 세 개, 적으면 두 개의 백화점 체인만 살아 남는다. 그들이 전체 백화점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미국식의 정상적인 세일(재고품 처리와 고객사은 행사)은 우리나라에서는 어차피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백화점은 재고품이 거의 없다. 재고정리라는 것은 백화점에 입점해 판매하는 업체의 재고이지, 백화점의 재고가 아니다. 또 우리나라 백화점은 미국의 백화점은 꿈도 못꾸는 고객사은 행사(무료 셔틀버스 운행, 각종 주차서비스, 백화점카드 6개월 무이자판매 등)를 한다. 이것 자체로도 고객유인은 충분하다. 세일완화의 재미를 톡톡히 본 초대형백화점이 세일을 해대면 우리 나라의 일반 재래시장(예; 썰렁해지는 남대문시장), 아웃렛상가(예; 평균 30% 매출이 주는 문정동상가), 소형점포(예;손님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동부이촌동 점포)가 전부 추위에 떤다. 그 외에 각종 대리점도 휘청거리고, 심지어는 슈퍼마켓도 속을 썩인다. 세일바람에 대한민국 유통의 전체 기반이 흔들거린다.

이러한 세일은 자체적으로 혹은 외부압력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 자체적으로는 힘들다. 이유는 거의 모든 백화점들이 원하나 세일의 득을 톡톡히 보는 극소수의 백화점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일바람을 타고 백화점업계를 독점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와 같은 세일바람에서는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것을 해결할 주체는 정부밖에 없다. 이것은 규제부활의 차원이 아니라 독점방지의 차원이다. 그 이유는 독과점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정부정책(산업질서 유지와 공정거래 유지)의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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