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지진구조 고맙다며 식사 초대 오케스트라 30여 명이 나와 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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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권철현(64·사진) 주일대사가 6일 귀임한다. 주일대사 재임기간 3년2개월은 최근 20여 년 사이 최장이다. 교과서 왜곡문제로 인한 본국소환,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의 54년 만의 일본 정권교체, 한·일 강제병합 100년, 독도 문제, 동일본 대지진 등 격랑의 외교현장을 진두지휘한 권 대사를 인터뷰했다.

 -어제(2일) 간 나오토(菅直人) 일 총리가 곧 사임할 듯 말했다가 다시 부정하는 등 일본 정치권이 오락가락한다.

 “자민당이나 민주당 모두 새롭게 대변혁을 하는 타이밍을 놓쳤다. 또 경제가 안 좋다 보니 실망한 국민이 정치 탓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총리가 수시로 바뀌고, 바뀌어도 경제가 안 좋아지니 정치권이 또 포화를 맞는 악순환이 된 것이다. ”

 -총리가 툭하면 바뀌니 외교도 힘들었겠다.

 “내 임기 동안 총리가 4명 바뀌고 외상이 5명 바뀌었다. 교과서 문제 등을 책임지는 문부과학상도 5명 바뀌었다. 툭하면 사람이 바뀌니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해나간 결과 한·일 관계가 최고로 좋은 시기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게 돼 다행이다.”

 -지난해 8월 ‘간 담화’에 조선왕실의궤 등의 반환이 들어가게 된 경위와 도서반환 과정의 에피소드가 있나.

 “‘말로만 해선 안 된다. 실천적 내용이 절대 필요하다’는 설득을 해 정말 막판에 담화에 들어가게 됐다. 협상 과정에서도 한국의 전문가들이 ‘661권을 돌려받아야 한다’ ‘아니다. 821권이다’고 저마다 주장할 때 ‘더 있으면 어떻게 하려 하느냐’며 신중한 자세를 부탁했다. 협상에 들어가자 일 정부는 처음엔 ‘321권+α’를 이야기하고 나왔다. 그래서 ‘말도 안 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출해간 것도 꽤 있다고 안다. 비록 우리는 증명자료가 없지만 자료 잘 챙기는 당신들은 다 갖고 있지 않느냐. 더 내놔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1205권이 됐다. 임금 교재인 경연(經筵)과 제실도서(帝室圖書)도 상당부분 복사본을 건네주기로 했다.”

 -일왕(일본에선 천황) 내외가 국빈 방문한 외국정상 외의 인사를 식사 초대한 경우가 거의 없는데 권 대사 부부를 극히 이례적으로 초대를 한 이유는.

 “1일 점심자리에서 일왕은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이 구조견을 신속히 보내주고 이명박 대통령이 재해지역 현지에 직접 가 위로를 보내준 점에 감사해 했다. 식사 도중 음악이 흘러나와 레코드판을 튼 줄 알았는데 식사 뒤 문이 열리자 뒤에 30여 명의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를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일본을 떠나지 않고 지켜준 한국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왕은 오케스트라 악단에 다가가 “이 중에 한국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한 사람이 손을 들자 ‘(조상은) 언제 한국에서 오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 분이 ‘나라(奈良)시대’라고 답하자 일왕은 ‘그럼 1300년이나 됐네요’라고 하더라.”

 -3년2개월을 돌이켜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 점은 뭔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역사적 시기에 부임해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순간을 경험했고, 간 총리 담화와 독도문제의 전환점을 이뤄내는 역사적 주춧돌을 놓고 가는 느낌이다. 특히 독도문제와 관련, 올 3월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계기로 한국이 우월적 지위에 입각해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대응을 하는 쪽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은 정말 옳았다고 본다.”

 -일본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한국 내에서는 ‘더 이상 일본에 배울 건 없다’ ‘일본은 갔다’는 주장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이 일부 일본을 앞선 부분이 있는 건 맞지만 일본은 기술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저력이 있다. 노벨과학상을 14명이나 배출한 나라다.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에서도 나타난 질서의식과 남을 배려하는 선진의식은 일본이 한물간 게 아니라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본다. 국격이란 면에서도 한국은 더 노력해야 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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