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는 게 첫걸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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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호 16면

“슬로라이프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짬을 내서라도 슬로라이프를 접하려는 도시인이라면 이런 질문부터 던지게 된다. 슬로푸드·슬로워킹·슬로패션 등 많은 개념 속에서 선뜻 첫발을 내딛기 어렵기 때문이다. 『슬로라이프』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 교수는 ‘걷기’를 답으로 내놓는다.
그가 말하는 걷기는 특정 지점에서 특정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산책’이다. 산책은 걷는다는 일 그 자체에 만족한 상태로 한눈팔면서 가는 길, 어슬렁거리며 걷는 길이다. 또 “길을 가다가 잠깐 멈춰 서도 좋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도 좋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슬로라이프, 어떻게 시작할까

특정 지점 간 이동에는 더 빨리 효율적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산책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쓰지 교수는 슬로라이프의 첫걸음으로 “산책을 되찾자”고 말한다.

『슬로푸드 슬로라이프』를 펴낸 경남대 김종덕(사회학과) 교수도 역시 ‘걷기’를 강조한다. 김 교수는 “날마다면 더 좋겠지만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걸어 보자”며 “걸으면서 옆사람과 이야기도 나누고 주변도 관찰하라”고 권한다. 걷기를 통해 주변을 좀 더 알게 되고 삶에 여유로움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나도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며 “각자 사정이 달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걸을 수 있는 거리라면 걷는 게 좋다”고 말한다.

슬로푸드의 권위자답게 김 교수는 베란다 등을 이용한 작은 텃밭 가꾸기도 추천한다. 그는 “상추 등 안전하고 신선한 채소류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으로 자녀들에게는 생명을 알게 하고 흙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패스트푸드를 사 먹기보다는 집에서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두레방공방을 운영하는 최금옥(52)씨는 ‘스스로 심고 거두는 먹을거리’를 우선 꼽는다. 창평면은 2007년 말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슬로시티’로 선정된 지역이다. 최씨는 직접 재배하고 채집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천연으로 옷을 염색해 만드는 등 슬로라이프의 대표적인 실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금은 불편하지만 가공된 음식을 사 먹는 게 아니고 내가 심어서 또 거둬서 먹는 것만큼 더 즐거운 행복은 없다”고 말한다.

‘느리고 고요하게 사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지닌 국내외 ‘캔들(Candle)족’의 제언도 참고할 만하다. 이들은 매일이 어렵다면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전등 대신 촛불을 켜자고 주장한다. 촛불을 켬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기와의 단절을 통해 TV와 라디오, 컴퓨터에 뺏겼던 시간을 되찾고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자는 취지다. 또 촛불의 빛으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촛불 아래서 천천히 꼭꼭 씹으며 고요한 식사를 즐기자고 제언한다. 슬로라이프와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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