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盧風의 막후...'호남 청와대'로 불리며 사업 확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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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호 03면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검찰 수사와 정치권 논쟁이 이 은행 2대 주주인 박형선씨에게 집중됨에 따라 박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박씨 집안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운동권 명가(名家)’로 불린다. 광주일고를 나온 뒤 1972년 전남대에 입학한 박씨는 학생운동에 가담한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지만 10개월 만에 풀려났다. 여동생 박기순씨는 전남대 학생 시절 들불야학을 했다. 79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부산저축은행 사태’의 핵, 박형선씨는 누구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계엄군과 대치하다 사망한 윤상원씨와 박씨의 영혼 결혼식을 치러 줬다. 이 결혼식을 위해 지어진 노래가 운동권에서 애국가처럼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박형선씨의 부인은 5·18로 수배되자 미국으로 밀항한 고(故) 윤한봉씨의 여동생 윤경자씨다. 형 화강씨는 모 신문 광주지국장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광주 지역 유력인사 Q씨는 “박씨 집안은 호남의 재야운동권에선 성골과 같다”고 표현했다.

박씨는 80년대 동문인 L씨와 보성건설에서 건설업을 함께했다. L씨가 회장, 박씨가 부회장이었다. 하지만 사이가 갈려 회사를 그만두면서 L씨로부터 현금 30억원과 부동산을 합쳐 100억원대의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씨는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도 가까운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결됐다고 한다. 이해찬 전 총리, 정찬용 전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비서관 등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광재·안희정·서갑원 등 노무현 정부 실세들에겐 박씨가 ‘형선이 형’으로 통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2002년 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Q씨는 “당시 광주에선 처음에 이인제 후보가 절대 강세였다. 하지만 그걸 뒤집고 ‘노풍(盧風)’을 만들어 낸 숨은 주역이 박씨였다”고 말했다. 그는 “박씨가 노 후보와 재야 세력을 연결해 줬고 노 후보의 세미나와 강연, 중소기업인·언론인·교수 및 법조인과 여성단체 만남을 두루 주선했다”고 덧붙였다.

광주 지역의 또 다른 유력 인사 X씨는 2002년 광주 경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무현 후보의 호남 조직은 두 갈래였다. 핵심 조직은 박형선씨가 움직였다. 가톨릭수사인 김수복, 가톨릭계에서 여성·노동운동을 한 정향자씨 등과 함께 활동했다. 박씨가 10억원에 가까운 개인 돈을 써 가며 노 후보를 도왔다는 소문이 많이 났었다. 민주당이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해 1000원의 당비를 내야 책임당원이 됐는데 박씨가 당원들을 대부분 만들어 광주 경선을 휩쓸었다. 또 다른 조직은 K씨였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부속실에 있었던 Y씨와 한 팀이었다. K씨는 농협 승진 고시학원인 협동학원을 운영했는데 노 후보의 광주경선팀 운영위원장이었다. K씨가 농협 직원을 많이 알고 있어 농협을 통해 농민을 많이 동원했다. 이 조직은 문재인씨가 직접 운영하고 강금원씨가 도왔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박형선씨의 고생은 보상을 받았다. 광주 지역 중진 정치인 Z씨는 “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2003년 초 광주를 찾았는데 박형선씨와 K씨를 단독으로 만났다. 박씨가 정찬용 당시 광주YMCA 사무총장을 청와대 인사수석으로 추천해 관철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박씨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광주에서 ‘호남 청와대’로 불렸다”고 전했다. 그는 “박씨의 부인 윤경자씨가 건설업체 하도급업체의 부인 중 솜씨 좋은 사람들을 모아 김치를 만들면 박씨가 청와대로 들고 갔다고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관저로 직접 가 노 대통령 내외를 만났다고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박씨는 보성건설에서 나온 뒤 여수 지역 해변 공사에 연고권이 있는 건설회사를 인수해 2002년 해동건설을 만들었다. X씨는 “해동건설 매출액이 연 300억원 정도였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연 1000억원대로 급성장했다”며 “건설공사의 연고권을 합치면 사실상 1조원에 달하는 건설공사를 따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말했다. “당시 큰 공사를 따내는 데 고위 관리 C씨 등의 도움이 컸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광주은행 부행장 출신의 오지열 중앙부산저축은행장과 노무현 정부 말기에 사돈이 됐다. 결혼식장엔 이해찬 총리 등 당시 노무현 정부 실세들이 빠짐없이 집결했다는 것이 X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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