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질서와 국민 행복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국제대학원

연구년을 맞아 한 학기 동안 일본에 와서 지내면서 제일 먼저 받게 되는 인상은 역시 일본 사람들의 예절과 질서의식이다. 이들은 연방 허리를 굽실거리며 남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고, 원래 동방의 예의지국이었던 한국 사람들은 오늘날 자기 권익을 남들이 침범할까 봐 늘 경계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살고 있다. 왜 이렇게 다른 문화가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정착하게 된 것일까? 어떤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일까? 여기 와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일본과 같은 사회? 아니면 당당히 기를 펴고 살자는 한국과 같은 사회? 필자는 전자가 더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명의 발달이란 단순히 기술과 생산방식의 진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특히 사회를 이루고 군집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각자의 이기적 욕구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덜 주며 사는 방식을 발전시켜온 것이 문명이다. 예의와 절도는 서로가 보다 편하기 위해 발전시켜온 삶의 방식이다.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서로 상냥함을 보이는 것이 경계하며 충돌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편하다.

 얻어맞는 공무원이 평균 하루 1.5명이고 이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얼마 전 있었다. 예사로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보도였다. 사회계약의 가장 기본적 요소가 국방과 치안이다. 외적과 내부의 폭력으로부터 생명과 권리를 지켜달라고 국민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준수한다. 경찰이 과잉대응을 해서는 물론 안 되겠지만 시민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거나 심지어 얻어맞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어서야 이것이 제대로 된 경찰이라 할 수 없고 그런 경찰을 가진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라 할 수 없다. 정부가 법과 질서의 집행에 주저하게 되면 시민들 각자가 스스로 나서서 자기 권익을 보호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늘 경계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몸싸움도 불사해야 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한마디로 점잖게 살기가 어려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왜 질서를 잘 지키고 남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그렇게 조심하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추측을 동원해 보건대 과거 질서와 예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가차없이 일본도로 목을 치거나 순사들이 몽둥이로 다스려서 그런 생활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을까. 영국에서도 조그만 질서를 어겼던 사람들의 손발을 묶어 오래 체벌을 가했던 옛 기구들이 지금도 시골의 성문 앞에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도 처음부터 신사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영국과 미국의 경찰이 시민폭력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여기서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가 시민들을 매질로 다스려 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있는 법을 좀 더 엄중히 집행하는 권위를 세워야 한다. 시민의 인권을 위해 경찰이나 공권력이 엄중히 대응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 주변에서 억울하게 권익을 침해당하는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지레 시민들의 거친 항의를 두려워해 제대로 법과 규정을 적용하지 못하는 공무원도 얻어맞는 공무원과 똑같다. 번듯이 주차금지라고 되어 있는 좁은 동네 길에 차가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을 예사로 방치한다. 다른 차들의 통행이 불편해 구청에 단속 좀 해 달라고 하면 주민들이 반발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이면에는 살기 힘들어지는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시민들이 흉기와 주먹으로 공무원을 때릴 뿐 아니라 뚜렷한 근거 없이 심한 말과 댓글로 공인들을 공격하는 것을 예사로 여긴다. 법과 질서와 예절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각자가 스스로의 권익을 험한 말로, 높은 목소리로, 때로는 몸싸움으로 지켜야 하는 불편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행복도는 1인당 국민소득의 크기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자기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각자가 늘 경계하며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고단함은 자주 삶과 사회에 대한 좌절감을 가져온다. 예의와 질서는 중요한 공공재이다. 국민들이 편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목사업이나 청사 짓기도 필요하겠지만 예의와 질서를 세우는 일에 좀 더 많은 장기적 투자가 필요해 보인다. 이것이 또한 초·중등교육의 주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노년실업도 느는데 주차단속요원이라도 크게 늘리면 어떻겠는가.

조윤제 서강대 교수·국제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