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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땅에서 가야 유물이 나왔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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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남 신안군 안좌도 배널리고분에서 발굴된 투구·갑옷·칼·창·화살촉 등의 모습. 아래쪽 사진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 [동신대 문화박물관 조사단 제공]

전남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1㎞ 떨어진 신안군 안좌도가 과거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학설이 나왔다. 한·중·일 등 고대 동아시아 무역항로의 거점인데다, 바다와 내륙의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일본의 무역선이 영산강을 따라 육지로 들어오기 위해선 안좌도·압해도를 거쳐야 했다. 또 강진·영암·나주 등의 특산품은 안좌도를 거쳐 바다로 나갔다. 이런 안좌도에서 5세기 무렵에 제작된 가야 무덤과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서남해안의 섬 지역에서 갑옷 파편 등이 출토된 사례는 있지만 완벽한 형태의 투구와 갑옷 등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조사단(단장 이정호 교수)은 4월 중순부터 안좌도 ‘읍동고분(중심지)’과 ‘배널리고분(변두리)’에서 발굴작업을 했다. 이 가운데 모두 3기가 발견된 배널리 고분 한 곳에서 5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투구·갑옷·칼·창·화살촉·장식구(옥) 등 다량의 무기류가 발굴됐다. 투구는 충각부주(정수리에서 이마까지 각이 진 투구)이고 갑옷은 삼각판갑(삼각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으로, 5세기에 제작됐다. 이 고분의 양식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이며, 갑옷·무기 등의 부장품 역시 가야의 매장 풍습이다. 조사단은 이 같은 점으로 미뤄 고분의 주인공이 가야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장수로 추정했다. 나머지 2기의 고분은 묘실까지 도굴됐으나 잔존 형태로 봤을 때 백제 계통으로 추정됐다.

 배널리와 함께 발굴된 읍동에서도 고분 2기가 발굴됐다. 조사단은 읍동고분이 배널리보다 40∼50년 늦으며, 백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했다. 부여 능산리 고분과 양식이 같은 백제 사비기의 횡혈식 석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재근 신안군 학예연구사는 “고대시대엔 육로보다 해양 루트 개발이 중요했다”며 “해양 세력이 내륙으로 진출하거나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기 위해선 관문 역할을 하는 섬(안좌도)을 선점해야 하는데, 이 때 군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지역 역사학계에선 백제 근초고왕이 4세기 마한을 병합하고 대가야(고령)·소가야(고성)까지 세력을 확대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안좌도를 지키기 위해 당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야군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정호 동신대 조사단장은 교수는 “배널리 고분군이 입지한 섬은 고대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작은 무인도였다”며 “안좌도 일대가 고대 해양 루트의 전략적 요충지이고 무덤은 해로(海路)를 지키던 군사집단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이번에 출토된 투구·갑옷 등은 과학적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조만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유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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