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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읊듯 힘 빼고 부른 ‘비움’의 승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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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호 04면

1 김덕기(사진 왼쪽)씨의 피아노 반주로 리허설 중인 연광철.

고백한다. 연광철은 바그너 가수인 줄만 알았다. 남성의 음역에서도 가장 낮은 베이스, 그중에서도 바리톤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하는 어두운 목소리가 그의 것이다. 바그너는 오페라 작품에서 무겁고 엄격하며, 예측 불가능한 음의 진행을 베이스에게 맡겼다.연광철은 그런 바그너의 노래를 진지하게 소화해왔다. 바그너에 의해, 또 그를 위해 만들어진 독일 바이로이트 여름 축제에 15년째 초청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두 번 출연만으로도 성악가에게는 훈장과 같은 무대다.
26일 저녁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연광철은 바그너를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 이날 연광철은 한국 가수였다. 후반부에서 한국 가곡으로 청중에 충격을 던졌다.

베이스 연광철 리사이틀, 26·28일 서울 호암아트홀

연광철은 바이로이트의 대규모 오케스트라 대신, 오래된 음악 동료인 김덕기 혼자 지키는 피아노 앞에 섰다. 임긍수의 ‘강 건너 봄이 오듯’으로 시작된 연광철의 저음은 귀를 파고들며 청중의 몸을 진동시켰다. 피아노의 건반은 저음으로 내려갈수록 음정이 불분명해진다. 같은 원리로 사람의 목소리 또한 낮아질수록 선명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연광철의 저음은 가사를 한 구절씩 정확히 실어 날랐다. “앞 강에 살얼음은 언제나 풀릴 거나 / 짐 실은 배가 저만큼 새벽 안개 헤쳐왔네.” 그가 노래하면 객석까지 봄바람이 아련히 불었다. “달무리 뜨는 / 외줄기 길을 / 홀로 가노라(‘달무리’).” 노래가 바뀌면 무대에도 어둠이 내릴 듯했다.

소리를 윤색하는 대신 정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국 가곡은 거창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풍성하고 튼튼한 소리를 강조하는 해석으로 거듭 연주돼 왔다. 하지만 연광철은 이 같은 그간의 ‘관행’에 의문을 가지게 했다. 누구보다 튼튼한 소리를 가진 그는 오히려 편안히 시를 읊듯 한국 가곡을 불렀다. 바그너 오페라에서의 나팔 같은 소리도, 베르디 오페라에서의 권위 있는 왕의 외침도 모두 내려놨다. 세 시간짜리 오페라에서 보여준 힘과 기교가 가곡에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공연에 앞선 인터뷰에서 “한국 가곡에서 ‘나의 소리’보다는 ‘시와 이야기’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2 베이스 연광철.사진 크레디아 제공

한국 가곡 두 곡으로 이어진 앙코르는 이날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기록될 만했다. “삼수갑산 머루 다래는 / 얼크러 설크러 졌는데 / 나는 언제 님을 만나 얼크러 설크러 지느냐.” ‘신고산타령’을 부르던 중 연광철이 아무 음고 없이 외친 ‘대사’에 충격을 받지 않기란 어려웠다. 절규하고 선언하듯 그는 무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억지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시어와 정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파악하고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게 혹은 힘있게 보이려는 아무 노력 없이 불렀던 덕분이다. 이 때문에 이날 연광철은 ‘소리가 좋다’는 그간의 평보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받을 만했다. 한국어로 된 가사와 고국의 정서 덕분이라는 것도 짐작해볼 수 있다.

잠시 석 달 전으로 돌아가 보자. 뉴욕 타임스는 2월 이례적으로 큰 지면을 연광철에게 할애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출연한 것에 대한 리뷰였다. 여기서 목사 라이몬도 역할을 맡았던 그는 “티 없는 풍부함, 원만하면서 혈기 왕성한 저음의 탄력감, 위협적인 것부터 부드러운 유혹까지 아우르는 폭 넓은 표현력”이라는 평을 받았다. 1999년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한 후 10년 동안 줄곧 초청됐으며, 세계 음악계의 ‘파워맨’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이력을 소개했다. 연광철은 바이로이트와 메트를 축으로 빈ㆍ베를린ㆍ파리ㆍ밀라노에서 고정 출연하는 오페라 가수다. 도니제티ㆍ베르디ㆍ모차르트 등 바그너뿐 아닌 전통적인 오페라까지 아우른다는 점에 뉴욕 타임스는 주목했다.

연광철의 아우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2009년 이후 2년 만에 선 고국 독창회에서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골랐다. 사랑에 들뜨고 상처받으며, 성숙해 가는 청년을 그린 16곡짜리 연가곡집이다. 어릿어릿한 수채화 같은 감성이 녹아 있는 곡이다. 저만큼 아래에 깔려 있는 베이스의 음성이 이 곡에 어울릴까? 하지만 그는 테너ㆍ바리톤이 주로 부르는 이 작품을 유학생 시절 베이스 악보로 직접 옮겼다고 했다. 그리고 정식 무대에서 부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시인의 사랑’은 저음의 제왕의 동경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첫 곡 ‘아름다운 5월에(Im wunderschonen Monat Mai)’에서 연광철은 그런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무대를 열었다. 전설적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5월’이 꿈꾸는 듯한 감성으로 1965년 녹음된 이래 지금껏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연광철은 엄청난 저음으로 객석의 바닥까지 울렸다. 가장 낮은 음으로 내려가는 부분에서 오히려 힘을 놓아버리면서 몸 전체가 자연스럽게 울리도록 했다. 공연장의 잔향 효과를 기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몸 하나면 충분했다.

사랑의 찬란한 기쁨을 노래한 전반부 여섯 곡. 그는 목소리에서 권위를 지웠다. 유난히 어둡고 무거운 음성 대신 시어 하나 하나에 충실한 연인으로 돌아왔다. 절망을 노래하는 7번 곡 ‘내 원망 않으리(Ich grolle nicht)’부터는 쓴맛이 나기 시작했다. 오페라 무대 위 연광철이 언뜻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피아니스트 정명훈과 함께했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비하면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그는 슈만의 뜬구름 같은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28일엔 17세기, 즉 소박하고 간결한 음악이 나왔던 시대의 아리아를 골랐다. 저음왕의 선곡이라고 누가 예상 했을까.

신(神)ㆍ왕(王)ㆍ악(惡). 오페라에서 베이스의 역할은 이 셋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늘 꽉 차 있다. 소리와 존재감 모두 무겁다. 하지만 연광철은 비움이 채움의 한 수 위임을 보여줬다. 그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어쩌면 틀렸다. ‘저음의 왕’ ‘세계를 휩쓴 거인’ 같은 수식어는 연광철의 일부밖에 보여주질 못했다. 이번 무대에서 그는 좋은 노래를 골라 정확하게 전달하며 ‘노래꾼’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다. 앞으로는 또 어떤 것이 남아 있는가. 어쩌면 그조차 짐작하기 힘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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