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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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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30년 전인 1981년 여름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때만 해도 서울은 잠잠했다. 나는 그들의 결혼 소식을 호주 여행 중 들었다.

호주 남쪽의 섬인 태즈메이니아에서 바둑대회가 열렸고 서봉수 9단과 나는 그곳에 갔다. 우리를 초대한 교민 부부는 “아니, 얼마나 세계적인 뉴스인데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이에요”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7억5000만 명이 TV 중계를 봤단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신군부가 들어서고 광주 참사가 벌어진 지 불과 1년여.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에 수많은 청춘이 목숨을 던지던 시절인데 멀고 먼 남의 나라 왕자가 결혼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0년 후인 2001년 4월 찰스의 아들 윌리엄 왕자와 부잣집 예쁜 딸 케이트 미들턴이 결혼식을 올렸다. 호사의 극을 달리는 결혼식,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화려한 키스가 압권이었다. 이번엔 20억 명이 TV중계를 봤단다. 결혼식에 1천 몇백억원을 썼지만 그보다 몇 배의 경제유발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30년 전 찰스의 결혼식 때와는 다르게 한국도 이번엔 눈부신 관심을 보였다. 밥 먹고 살 만해진 탓일까. 30년 전엔 맥주조차 눈치 보며 마셨지만 지금은 드러내 놓고 돈 자랑하고 드러내 놓고 차별하는 시대다. 그 차이일까. 그래서 찰스의 몸종이 80명이란 얘기조차 굉장한 자랑으로 비쳐지는 것일까.

 한국에도 30년 동안 영국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많은 ‘귀족’이 생겨났다. 충성스러운 일본 아줌마들이 서울까지 날아와 생일 챙겨주는 한류 스타들, 김연아·박지성·최경주 같은 스타 선수들도 이 시대의 귀족으로 작위를 받을 만하다. 고급 관료나 종교인 등 ‘숨은 귀족’도 등장했고, 벌써 몰락한 귀족도 생겨났다. 대권주자들 정도의 성공한 정치인은 좀 더 높은 작위를 얻겠지. 그러나 우리 시대 최고의 귀족은 역시 재벌가일 것이다.

 신분이 다른 그들 소수의 귀족이 세상을 지배한다. 요즘 TV드라마는 바로 그 귀족들 얘기, 그리고 그들과 운 좋게 조우한 신데렐라 얘기다.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은 그 어떤 막장 드라마도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진품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왕자’라는 브랜드는 여인의 가슴을 흔드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그곳 번쩍거리는 크리스털 정원에서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진다. 환상이다. 그게 눈을 홀린다. 우리 인생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먼 별나라 얘기지만 근사한 건 근사한 거다. 영국 왕실의 호사와 사치를 최고의 상품으로 포장해낸 마케팅 실력이 기막히다. 흔적조차 가물가물한 조선 왕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민주주의를 이룬 다음에 곧바로 귀족의 시대가 오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게 역사의 수순 같기도 하다. 불나방처럼 화려함을 좇는 허영심과 외로움이 빚어내는 필연의 수순-. 귀족의 시대가 필연이라면 이젠 칼자루를 쥔 귀족들에게 자선과 관용을 바라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을까.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