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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승용차처럼 편안, 시속 140㎞로 질주 ‘바다의 KTX’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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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호 08면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 앞바다에서 5인승 위그선 ‘아론 7’이 수면 위 5m 높이로 힘차게 비행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이륙 전 바다에 떠 있는 모습. 조용철 기자

16일 오후 3시40분쯤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바닷바람은 아직 차가운 느낌이었다. 방수복에 구명조끼까지 차려입고 소형 고무보트에 올랐다. 일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5분여를 달려가자 물에 약간 가라앉아 있는 ‘위그선(WIG·Wing-In-Ground ship)’이 눈에 들어왔다. 날개 길이가 10m가량으로 수상비행기로 착각될 정도로 항공기를 쏙 빼닮았다. 민간 업체인 C&S AMT가 2008년 제작해 시험운항 중인 5인승 위그선 ‘아론 7’이었다.

‘날개 달린 배’ 위그선 타봤더니

조종석에는 각종 계기판이 빼곡했다. 이 배는 파고가 2m 이내면 이수(이륙) 가능하고 2.5m 이내면 착수(착륙)할 수 있다. C&S AMT의 차형경 전무는 “1회 주유(200L)로 800㎞ 이상 운항할 수 있다”며 “선체는 부식을 막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케블러·카본에폭시 등 특수소재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오후 3시55분쯤 엔진이 가동됐다. 항공기용 프로펠러 엔진이었다. 옆 사람과 대화가 힘들 정도로 소음이 심해져 마이크가 달린 헤드셋을 써야 했다.

본지 강갑생 기자(오른쪽)가 위그선에 탑승해 있다.

“이수(이륙)합니다.” 이규익(45) 조종 교관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선체가 파도와 부딪히며 물이 마구 튀었고 육중한 충돌감이 몸에 전해져 왔다. 이수 속도는 시속 110㎞ 정도였다. 비행기 이륙 속도는 시속 300㎞가량이다.

1분여를 크게 흔들리며 달리자 갑자기 모든 진동이 사라졌다. “고도 5m, 70노트(시속 약 130㎞)로 이동 중입니다.” 물 한 방울도 튀지 않는 모습에 비로소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제부도 촛대바위 쪽으로 이동해 선회합니다.”

주변 풍광이 그야말로 휙휙 지나갔다. 김양식장에 설치된 하얀 부표에 묻어 있는 얼룩이 확연히 보이고 조업 중인 어선이 눈높이로 스쳐 지나갔다. 멀리 이파도가 보였고 제부도 끝의 촛대바위가 눈에 띄었다. 뒷바람이 불어오자 속도계가 75노트(시속 약 139㎞)를 가리켰다. 푹신한 가죽의자에 등을 기대자 승차감 좋은 최고급 승용차로 뻥 뚫린 고속도로를 한껏 달리는 느낌이었다.

10분쯤 뒤 이 교관이 “착수(착륙) 모드로 들어갑니다”고 알렸다.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고 물에 가까워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에 닿는 순간이었다. 비행기 착륙보다 충격이 커 몸이 퉁퉁 튕기는 기분이었다. 오후 4시13분, 착륙을 완료했다. 30㎞ 구간을 돌아오는 짧지만 이색적인 비행(?)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위그선은 별명이 ‘날아다니는 배’다. 수면 위를 1~5m 정도 떠서 가기 때문이다. 기존 선박과 달리 물의 저항을 받지 않아 에너지 소모가 30% 수준에 불과하다. 최대 시속은 엔진에 따라 100~550㎞까지 가능하다. 이 때문에 운송비용이 고가인 항공기의 단점과 저속인 선박의 단점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차세대 운송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다.

위그선은 ‘지면효과(ground effect)’를 활용해 난다. 항공기는 양력(날개의 공기 흐름 간 압력 차에 따라 지면과 수직으로 물체가 떠오르게 하는 힘)을 받아 상승한 뒤 높은 고도로 비행한다. 반면 위그선은 날개가 수면에 가까울수록 양력이 커지는 지면효과를 이용해 낮게 난다.

지면효과는 1920년대 비행기 조종사들에 의해 확인됐다. 착륙할 때 기체가 지면과 가까워지면서 날개 아래에 생기는 양력이 완충작용을 해 좀 더 부드럽게 착륙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지면효과를 이용하면 지상에서도 낮게 떠서 비행하는 게 가능하다.

한때 위그선을 비행기로 볼지, 배로 볼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결국 90년대 말 국제해사기구(IMO)에서 고도 150m 이하로 뜬 채 다니는 점을 감안해 배로 분류했다. 위그선은 운항 고도 등에 따라 A·B·C형 세 가지로 나뉜다. A형은 주로 수면 위에 바짝 붙어 비행하는 것으로 호수나 강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B형은 운항 중 돌발적인 장애물이 나올 경우 최고 150m까지 점프(급상승)할 수 있다. ‘아론 7’이 해당된다. 높은 고도로 계속 비행할 수 있지만 연료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C형은 150m 이상을 계속 날아다니는 유형이다.

국내 위그선 역사는 90년대 시작됐다. 러시아가 우리나라로부터 빌린 30억 달러의 부채를 갚지 못하면서 대신 제공한 군사기술 중 하나다. 93년 위그선 기술이 최초 도입됐고 2001년 한국해양연구원이 민간업체와 공동으로 4인승인 갈매기호를 개발해 시운전에 성공했다. 2005년에는 100t급 대형 위그선 개발계획이 추진됐으나 경제성 등을 이유로 무산됐다.

현재 국내 위그선 제작업체는 C&S AMT와 윙십테크놀러지 두 곳이다. 실제 탑승이 가능한 배를 선보인 곳은 C&S AMT로 올 하반기 포항~울릉도 간 정기 운항을 목표로 8인승 위그선을 만들고 있다. 15인승과 20인승 개발에도 착수했다. 판매가는 5인승이 10억원, 8인승이 16억원가량이다.

지난해 3월에는 ‘아론7’이 포항~울릉 구간을 1시간40분 만에 주파한 바 있다. 쾌속선으론 3시간가량 걸린다. 이 회사의 이재국 R&D센터장은 “시속 200㎞로 운항하면 1시간10분이면 된다”며 “8월이면 해당 구간에서 8인승의 시험운항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육지로부터 중장거리에 있고 선박이나 항공기 투입이 어려운 섬 지역의 교통 대체 수단으로 활용 폭이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윙십테크놀러지는 군산~제주 노선에 투입할 50인승을 제작 중이다.

국토해양부는 위그선 운항을 위해 최근 선박검사 기준을 만들었고 조종사 채용을 위한 선박직원법도 개정했다. 조종사가 되려면 4급 또는 5급 항해사 및 자가용 조종사 자격 이상으로 일정 기간 승무 경력을 갖춰야만 한다.

위그선이 상용화되려면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우선 바다에서의 운항률을 높여야만 한다. 외국에서도 파고가 높은 날엔 이륙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 정기 운송에 대부분 실패했다. 이재국 센터장은 “현재는 여객선에 비해 운항조건이 불리하지만 기술을 보완하면 여객선 수준까지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비싼 요금도 걸림돌이다. 포항~울릉 간의 경우 13만원가량으로 책정돼 있다. 쾌속선 우등석 요금(6만여원)의 두 배다. 전용 선착장 등 인프라 구축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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