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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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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검은색은 세기말적 색깔이다.” 소니·프라다·겐조 등 명품 브랜드 디자인을 도맡아온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의 말이다. 그는 세기말이 다가오자 갖고 있던 검은색 옷을 모두 버렸다. 어둡고 비관적이란 이유에서였다. 대신 옷장을 분홍색과 흰색, 은색 등 밝은색 의상으로 채웠다. 전통적으로 검은색은 죽음과 어둠, 악을 상징했다. 영어 ‘black(검은)’은 고대 영어 ‘blac(어두운)’에서 왔다.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에 ‘검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1987년 일어난 뉴욕 증시폭락을 ‘블랙 먼데이(검은 월요일)’, 암시장을 ‘블랙 마켓’이라고 하는 식이다.

 서양의 상복(喪服)이 검은색이 된 것도 검정이 빛의 부재, 즉 생명이 사라졌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검은색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 게 시작이다. 영국 자동차 롤스로이스의 유명한 번호판 ‘RR’은 원래 빨간색이었다. 창립자 롤스가 비행기 사고로, 로이스가 과로로 숨지자 후계자들은 추모하는 마음에서 번호판을 검은색으로 바꿨다.

 검은색은 한편으론 품위와 권위, 고급스러움을 상징한다. 중세 독일에선 남성의 힘과 권력을 뜻했다. 독일 성(姓) 중 ‘슈바르츠(Schwartz·검은)’가 흔한 건 그래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검은 튤립』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하를렘원예협회는 검은 튤립 재배에 성공하는 사람에게 10만 플로린의 상금을 내건다. 튤립 투기 광풍이 불었던 당시 검은 튤립은 ‘가장 완벽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튤립’으로 통했다.

 이런 이미지를 상품에 이용한 게 ‘블랙 라벨’이다. 고급 소재를 쓰고 한정된 수량만 만들어 가격을 올린다. 버버리나 아르마니 등 럭셔리 브랜드가 애용한다. 몇 년 전 한 신용카드회사는 최상류층 고객 9999명을 위한 ‘블랙카드’를 내놨다. 신용카드의 블랙 라벨이다. 이를 디자인한 사람이 검은색을 싫어했던 라시드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최근 ‘프리미엄급 라면’을 표방한 신라면 블랙이 출시 한 달 만에 매출 90억원이 넘는 대박을 터뜨렸다. 값이 기존의 두 배를 넘는다. “사회지도층이 먹는 라면이냐” “돈이 아까워 국물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마셨다”는 소비자 반응이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하다. 라면은 서민 음식의 대명사다. 고급도 품위도 좋지만 라면에 블랙 라벨이라니 어딘지 어색하지 않은가.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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