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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부부(夫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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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고종 13년(1876)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는 조선 대표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관세권과 사법권이 부인된 불평등 조약이었고, 구로다는 그 대가로 2000엔의 상금을 받는다. 1878년 3월 28일 농상무(農商務)대신 구로다는 만취 상태로 귀가하다가 부인이 정중하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로 베어 죽였다. 폐병을 앓고 있던 아내는 빨리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단단진문(團團珍聞)』은 판매금지되었지만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구로다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대경시(大警視)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가와지는 구로다 부인의 관을 개장한 후 “타살 흔적이 없다”고 외치고 얼른 덮어버렸고 사건은 끝났지만 의혹은 계속되었다.

 조선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은 혼인하면 부인이 남편 성을 따르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가문을 대표해 시집가는 것이기에 묘비에도 본관(本貫)을 썼다. 혼인은 집안 사이의 결합이기에 살해는커녕 서로 존대했으니 구타 사건도 발생할 수 없었다. 실제 살해했을 경우 당연히 사형이었다. 그러나 구로다는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 승진해 1896년에는 내각 총리대신까지 오르니 알 수 없는 나라다.

 선조 무렵 문신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조선 중기의 부부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유희춘 부부는 선조 1년(1568) 부인 송덕봉의 친정어머니 제사를 함께 모신다. 처가도 친가와 똑같이 존중했다는 뜻이다. 선조 3년(1570) 유희춘은 서울에서 홍문관 부제학으로 근무하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편지로 생색냈다. 그러자 송덕봉은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이지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라는 답장을 보냈다. 송덕봉은 선조 4년(1571)년 전라감사가 된 유희춘에게 전라도 담양의 친정 부모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유희춘이 “반드시 사비로 세워야 한다”고 답변하자 ‘착석문(斲石文)’을 보내 “사가(私家)에서 변통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부탁했겠소”라면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장사 치렀다”면서 석물 단장을 재차 요구했다. 이때만 해도 시댁과 친정 봉양은 사위와 며느리의 공동 의무였다. 조선 중기만 해도 부부는 평등했던 것이다. 5월 21일 부부의 날에 생각난 단상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