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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났을 때 연락 끊는 사람의 득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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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퇴직 후 창업을 통해 재기를 도모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최근 통계를 보면 창업에 성공하는 이는 전체 창업자 중 3~5%에 불과하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하는 나머지 창업자들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때다. 시스템의 시작은 도산한 창업자 자신의 도덕성이다. 필자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재기에 성공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지켜본 결과 두 그룹 사이에는 몇 가지 명확한 차이점이 있었다.

 1998년 초 외환위기 당시 공조설비 제조회사를 운영하던 K씨는 결국 부도를 피하지 못했다. 월급쟁이였던 K씨가 회사를 인수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사업 경험이 상대적으로 일천한 그였지만 해결방법은 정석을 밟았다. 부도가 나자 채권자들을 불러 모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 채권자는 추심절차를 밟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는 대표 자리를 친구에게 넘긴 뒤 채무와 관련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기로 했다. 책임을 다한 그는 결국 2년 뒤에는 다른 업종에서 성공했다. 그전 회사의 도산으로 인한 빚도 시간을 두고 갚아 나갔다. 일부 금융기관은 그의 회사가 진 빚의 일부를 감면해 주기도 했다. 도산을 경험한 그 회사는 다른 경쟁사들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살아남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산업용 밸브 제조회사 출신인 P씨는 경력을 살려 2000년 초 자신의 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회사는 설립 2년 만에 부도 위기를 맞았다. 부도나기 직전까지 그는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정부 지원금이 나온다. 조금만 더 도와 달라”며 돈을 빌렸고 결국엔 부도를 냈다. 그런 다음엔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했다. 일부나마 빚을 갚기도 했다. 그것도 자신을 협박하는 채권자들에게만. 그를 믿고 기다려 준 이들에게는 부도 사실조차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그 뒤로도 “재기하면 갚겠다”고 공수표만 날리던 그는 결국 현재까지 재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부도가 나더라도 신용을 잃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신용을 지켜온 이에게는 기존 거래처에서도 마냥 등을 돌리지 않는다. 원자재를 신용으로 공급해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직원들의 협조를 구하면 사장을 믿고 돕는 직원도 소수나마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재기를 위한 사회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부도 여부를 예측해 사회적 손실을 가늠할 수 있다면 어떨까. 경기 불황으로 인한 일시적인 자금 부족인지, 사업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선별할 수 있는 금융 시스템을 갖추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도 문제다. 이런 관행이 남아 있는 한 사업성 자체와 신용을 중심으로 사업자금을 빌려 보려는 창업자들에게는 대출 자체가 사업 못지않게 어려운 장벽이 될 수 있다.

 ‘돈이 된다’고 하면 무조건 먹어 치우려 드는 대기업들도 지금까지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 부족한 자금과 기술로 기껏 시장을 일궈 놔도 대기업이 진출한 다음에는 풀뿌리 하나도 남지 않는 게 현실이다. 실력 있는 중소기업을 가려내 이들에게 수요처를 알선해 주는 시장친화적 정부 지원 시스템도 아쉽다.

 누구나 창업을 하면 한두 번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실패를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재기 여부가 갈린다. 돈을 잃더라도 회복할 수 있지만 사람이나 신용은 한 번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대기업 위주로 촘촘히 짜인 경제구조도 창업자들에게는 버겁다. 결국 한 나라의 경제는 중소기업들이 얼마나 빨리 최소의 비용으로 재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우리 사회를 두고 계층 간의 이동도 어렵고, 이병철·정주영 같은 기업인이 더 이상은 나오기 힘든 토양이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많은 창업자가 여전히 세파에 맞서며 자신의 사업체를 키우고 있다. 이들에게 힘을 보태 줄 때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