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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에서 토크쇼 황제로 … 53년간 5만 명 인터뷰

중앙선데이

입력

‘신(神)만 빼고는 지구상 모든 유명인사와 인터뷰한 사람’. 지난해 은퇴를 선언한 미국 CNN의 장수 토크쇼인 ‘래리 킹 라이브’의 사회자 래리 킹(Larry King·사진)을 한마디로 묘사한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래리 킹은 스타가 즐비한 미국 영상매체에서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킹은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로런스 자이거(Lawrence Zeig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유대인이며 각각 오스트리아·벨라루스계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킹은 가정 형편이 빈한해 고교 졸업 후 생활전선에 나선다. 택배 배달부, 청소부 등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다. 방송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친구의 권유로 마이애미로 간다. 킹은 플로리다 지역 라디오방송에 주급 55달러로 취업해 낮 12시부터 자정까지 진행되는 대중음악프로 디스크자키로 마이크를 잡기 시작한다. 57년 5월 첫 방송을 내보낸 킹은 이후 대담 프로에 투입되면서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인기를 얻어간다. 그러다 킹에게 전기(轉機)가 찾아온다. 마이애미에 공연차 들른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바비 다린을 인터뷰한다. 이 가수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50년대 말 한때 미국 청소년의 우상이었다. 이 인터뷰 덕에 그는 대담 사회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 85년 CNN은 지방방송에서만 경력을 쌓은 킹을 과감하게 스카우트해 ‘래리 킹 라이브’라는 대담 프로를 맡겼으며 이 프로는 25년간 지속됐다.

‘시골영감’이미지로 기대한 답 끌어내
킹은 방송 경력 53년 동안 무려 5만 명을 인터뷰했다. 대통령, 정부 고관, 학자, 경제인, 영화인, 체육인, 가수 등 지구상 유명인들 거의 모두가 킹의 손님이 되었다. 그중에는 오바마와 만델라도 있었고 전처 살해 혐의를 받은 미식축구 스타 O J 심슨, 기괴한 패션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가수 레이디 가가도 있었다. 그가 모시지 못한 명사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명배우 잭 니컬슨 등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리고 출연자도 그 프로그램에 나가면 자신의 명성이 새삼 부각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프로 제작진은 명사 섭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윈윈’ 관계다. ‘래리 킹 라이브’는 한 명의 고정 사회자가 최장시간 진행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킹은 은퇴했지만 연 4회 정도 특별 출연을 하기로 CNN 측과 합의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부인에게 얻은 자식과 손자·손녀 등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최근에는 LA 부촌 베벌리힐스에서 유대인의 전통 빵이며 많은 미국인의 아침식사 대용인 베이글 빵가게 체인점의 대주주로 참여해 사업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킹은 이달 25일 한국 민간방송이 주최하는 ‘서울디지털포럼 2011’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방한한다. 킹은 포럼 개막식에서 ‘연결자’(The Connectors)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킹이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한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의 외모다. 킹은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시골 영감님’의 풍모다. 그만의 브랜드인 멜빵과 4각 뿔테 안경도 상대방의 경계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저 보통사람의 모습이다. 게다가 고교 졸업장밖에 없어 가방끈도 짧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그다지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인물에게 더 호감을 갖는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미남도 아닌 킹은 평생 여덟 번 결혼했다. 그리고 인터뷰 기법 또한 특별하지 않다. 자극적인 질문으로 출연자를 코너에 모는 걸 즐기는 가학성 사회자형이 아니다. 그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짧은 질문을 던져 상대가 가급적 많은 말을 하게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인터뷰 방법이 출연자로부터 기대한 답을 얻어내는 데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바탕에서 프로를 진행한 것이다.

여덟번 결혼, 요즘은 베이글 빵 사업
필자는 지난날 직업상 여러 나라에 살면서 각국의 대담 프로를 유심히 보았다. 다루어지는 주제와 함께 사회자와 출연자 관계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대담 호스트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있다. 하나는 래리 킹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답변을 유도하는 형이다. 이 범주에 속한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TV 앵커 안 셍클레르(Anne Sinclair)다. 이 여성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이며 유대인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부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흡사 응접실에 편안하게 앉아 속삭이듯 대화하는 식으로 무거운 소재의 주간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는 ‘7/7’ 프로를 오랜 기간 이끌었다. 정반대의 형도 있다. 사회자가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곤혹스러운 질문만 집중적으로 던져 게스트가 홧김에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 폭스뉴스의 빌 오라일리(Bill O’Riley)다.

필자는 가끔 저녁 늦은 시간에 방송되는 한국 TV들의 대담 프로를 본다. 국내에서 제법 인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급 남녀 사회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 군림하는 자세를 보인다. 출연자가 기획 의도에 부합하는 답변을 하지 않거나 횡설수설할 기미가 보이면 중간에 말을 가차 없이 자르는 건 다반사다. 사회자는 말 그대로 사회자인 모더레이터(Moderator·조정자)다. 그런데도 자신의 권위적인 진행 방법에 대해 시청자가 갈채를 보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명도 있는 출연자를 괴롭히면 시청자가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래리 킹이 오랜 기간 인기를 누릴 수 있었나 하는 해답과 극명하게 차별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명지대 객원교수·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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