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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큰 의사와 큰 교육자의 꿈 이루는 경원대 이길여 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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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여’란 이름은 ‘여풍당당’의 상징이다. 일제시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척박한 토양에서 태어나 의사의 꿈을 실현했다. 국내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산부인과를 열었다. 인천길병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협력의원을 설립했다. 가천의대 설립으로 의료네트워크 허브(Hub)를 완성했다. 그가 지금 큰 교육자의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동안 내실을 다진 경원대와 가천의과학대를 통합하는 것이다. 목표는 메디컬과 바이오 중심의 세계적인 대학교다. 10년 내 국내 10대 종합대학을 겨냥하고 있다.

스스로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라는 그는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작지만 크다. 철쭉꽃이 만발한 5월의 경원대에서 그를 만나 꿈 이야기를 청했다. 그의 호칭은 그때그때 다르다. 가천문화재단과 가천의대길병원의 이사장, 경인일보 회장, 경원대학교 총장인 것이다. 이번엔 총장이다.

글=박종권 선임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의사의 꿈

 이길여 총장의 어머니는 숟가락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새참이 든 광주리를 열자, 밥과 반찬은 간데없고 누런 놋수저만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영락없는 ‘고추’일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아들이 없어 손이 귀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산부인과 의사가 될 것이란 계시가 아닐까요.

 “그보다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뜻이라고 해요. 사실 지금 ‘식구’가 수만 명이에요. 미신은 믿지 않지만, 이런 꿈풀이는 어릴 적부터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도 작용했어요. 일종의 강력한 자기암시랄까.”

●중앙일보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일찍부터 의사의 꿈을 키웠다고 했는데요.

 “버려졌거나 다친 개와 고양이를 보면 데려다가 씻기고 치료했지요. 그러면서 치유의 기적이랄까,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어요. 자연히 의사놀이에도 심취했죠. 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얼마나 쉽게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지 깨달았어요. 조금만 일찍 치료했더라면 살릴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의사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예방주사를 맞으며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고.”

●지방 고교에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게 당시로선 화젯거리였을 텐데요. 또 전쟁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공부했나요.

 “이리여고 출신으로 최초의 서울대 의대생이 됐죠. 군산에서 기차로 통학하면서도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전쟁 중이어서 연합대학의 형식으로 부산·전주를 옮겨 다니며 수업했죠. 모두가 실험실습 도구랑 교육자재는 꿈도 못 꾸고. 인골(人骨)을 사서 방에 두고 명칭을 익히며 공부하는데 동네 어른들이 부정 탄다고 난리를 피웠어요. 송장을 집 안에 들이면 안 좋다고. 할머니가 막아줘 공부할 수 있었죠.”

●항상 모범생이었습니까.

 “그런 편이었지만, 고교 때는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소위 ‘땡땡이’ 친 적도 있었죠. 선생님께 혼났죠. 대학 때도 가끔은 멋도 부렸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병원은 국내에서 처음이었다는데요.

 “처음엔 인천에서 ‘자성의원’을 운영했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9층짜리 병원을 지으면서 ‘이길여산부인과’로 이름을 붙였어요.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에서죠. 당시 첨단 의료기를 갖추고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는데, 엘리베이터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병원은 잘 됐겠죠. 이렇게 성공하셨으니. 그런데 가슴으로 진료한다는 뜻은 무엇인가요.

 “진찰받으러 온 환자는 뭔가 불안해해요. 그런데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가슴에 닿으면 그러잖아도 불안한데 섬뜩 놀라게 되죠. 그래서 항상 청진기를 가슴에 품었어요. 환자에 대한 배려죠. 가난한 환자가 많아 수술 보증금도 없앴어요. 급한데 돌려보낼 수 없잖아요. 그랬더니 환자가 몰려드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안 받았는데, 환자들이 대신 채소나 생선을 가져오는 바람에 진료실이 장터가 됐죠. 혹시라도 위급한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칠까 이른 아침부터 365일 진료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병원이 커졌고.”

 그의 의사 꿈은 종합병원과 의대를 세움으로써 120% 이뤘다. 가천의대 길병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0년 진료비 청구액 기준 국내 8위다. 여기에 442병상의 암(癌)센터가 최근 개원하면서 길병원은 1700병상의 국내 5위권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가천의대에는 아시아 최초란 수식어가 붙은 두 연구소가 있다. 뇌과학연구소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이다. 여기서는 2009년 국내 최초로 한국인의 지놈 지수를 작성했고, 9.4T 핵(核)자기공명분광기는 아시아에 한 대뿐이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끼는 인형을 안고 어머니와 포즈를 취한 어린 시절의 이 총장. 신축한 ‘이길여 산부인과’ 옥상에서 간호사와 포즈를 취한 이 총장(왼쪽). ‘퀘이커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참봉사자의 모습을 보여준 닥터 골든과 이 총장(오른쪽). 퀸스 종합병원 수련의 시절 동료 의사들과 함께한 이 총장(왼쪽에서 둘째).

교육자의 꿈

●교육에 눈뜬 건 언제입니까. 계기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일찍부터 신간 서적에 탐닉했어요. 나오는 대로 사서 우리에게 읽어주셨죠. 좀 사는 집이었으니까. 동네 사람들도 모여 경청했어요. 이야기꾼이랄까, 신지식 전달자랄까. 목소리도 낭랑했죠. 창(唱)도 제법 하셨고. 그런 것이 피에 흐른다고 해야 하나. 의사로서 진료를 하면서도 환자에게 늘 자세히 설명했고, 누구에게나 새로운 것을 가르치길 좋아했어요.”

●혹시 병든 세상을 교육으로 구하겠다는 포부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거창한 포부는 뭐. 소의(小醫)는 한 사람을 구하고, 중의(中醫)는 여러 사람을 구하고, 대의(大醫)는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큰 의사와 큰 교육자는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가천의대에 애착이 많으실 텐데요. 강화도에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침 강화도가 의과대학 설립이 가능한 성장관리권역이고, 길병원이 위치한 인천에서 가까웠어요. 사적(史蹟)도 많고,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지명이 선두리(船頭里)인데,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뱃머리란 뜻이잖아요. 전국 41번째로 설립됐고, 전액 장학생으로 모집했어요. 1998년 입학식에선 내 의료인생의 결정체라고 했어요. 졸업식 때는 청진기를 선물했지요. 가슴으로 진료하라는 뜻으로.”

●이번에 경원대와 통합해 ‘가천대학’으로 거듭나게 됐죠. ‘제2의 창학’으로 부르시던데요.

 “두 대학의 전신까지 보면 4개 대학이 합쳐지는 거죠. 경원대와 경원전문대, 가천의대와 가천길대학. 통합 대학은 경원대를 인수한 1998년부터 꿈꿨어요. 서로 특성이 다른 대학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가 생기지 않겠어요. 통합 대학의 성공에 모든 것을 쏟아 넣을 생각이에요. 돈도 돈이지만, 내 모든 열정을 말이죠.”

●대표적인 통합 효과로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대학의 브랜드 가치가 크게 올라갈 것으로 기대해요. 가천의과학대는 의학·약학·보건·생명과학 분야에서 우뚝 선 특성화 대학이고, 경원대는 인문·사회·공학·예술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요. 통합하면 서로 부족한 연구와 교육역량을 보완할 수 있죠. 엄청난 시너지가 생길 거예요. 종합대학이 발전하는 데 의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커요. 연세대와 고려대, 성균관대도 의대가 없었으면 과연 오늘날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같은 이치예요.”

●가천대학의 대표 학과는 무엇이 될까요.

 “고려대는 법대, 연세대는 상대, 한양대는 공대, 경희대는 한의과대, 홍익대는 미대가 유명하죠. 우리는 메디컬과 바이오를 대표 학문으로 키울 거예요. 의학과 한의학, 약학·나노바이오·뇌과학이 중심이지요. 우리 대학의 신 성장동력이 될 거예요. 이를 집중 육성해 국내 최초로 노벨 의학상에 도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목표예요. 두고 보세요.”

●수년 전 일본 도쿄대는 ‘과제선진국’을 내세우며 학문 간 ‘통섭 교육’을 주창했었죠. 현대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복합적이어서 학문의 분야나 학과의 경계를 넘어 크로스오버, 또는 퓨전 학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에선데요.

 “얼마 전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하면서 매우 인상적인 화면을 보여줬어요. 기술과 인문학의 접목을 상징화한 사진인데, 특히 생명을 다루는 과학에는 인문과 예술이 필수적이라고 봐요. 그런 차원에서 벌써부터 ‘지성학’도 마련했죠. 이어령씨 같은 지성들이 와서 강연해요. 대학은 인간의 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생각하고,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정진하고, 행동하는 거죠.”

●앞으로 10년 내 국내 10대 사학으로 키우겠다는 포부이신데요.

 “처음엔 5년으로 생각했다가 현실적으로 계획을 수정했어요. 약속은 지켜야죠. 인생의 마지막 역작(力作)으로 생각해요. 머지않아 세계 100대 대학이 되는 게 진짜 꿈이에요. 기업들이 우리 졸업생을 찾는 날이 곧 오리라 확신해요. 그렇게 만들겠어요.”

 경원대를 찾아갈 때 지하철을 이용했다. 서울 강남에서 금방이었다. 지하철역에서 경원대 교정으로 곧바로 연결됐다. 마치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처럼. 서울 송파와 성남 분당과 위례신도시 사이 천혜의 위치였다. 이른바 ‘인 서울’ 대학교보다 접근성이 뛰어났다.

이길여 총장과 학생들.

남은 꿈

 이길여 총장은 아마도 계속 ‘현역’일 것이다. 정력적이고 샤프하다. 그의 남은 꿈은 뭘까. 모든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좌우명을 들었다. 박애·봉사·애국이다.

●글로벌 시대인데, 애국보다 ‘애민’이 어떨까요. 삼성의 ‘사업보국’이나 포항제철의 ‘제철보국’ 사시(社是)도 ‘인류사회 공헌’이나 ‘고객감동’ 또는 ‘윤리경영’으로 바뀌는 추세인데요.

 “물론 글로벌은 추세죠. 가천대학의 상징도 글로벌 보편 가치를 담게 될 거예요. 하지만 애국은 스스로의 다짐이에요. 아마도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를 겪고, 그런 가운데서도 해외 유학까지 한 데 대한 고마움이자 사회환원을 다짐하는 것이죠.”

●‘싱글’이신데, 재산은요.

 “이미 재단과 학교법인에 모두 넣었어요. 개인 것이 아니죠. 따라서 얼마나 되는지는 의미가 없어요. 제 방식의 사회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어린이와 어머니 사랑은 유별나다. 1993년부터 인천시내 113개 초등학교 회장들로 가천 미추홀봉사단을 구성했다. 어릴 때부터 봉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다. 수많은 고아원과 양로원도 지원한다. 그런 그도 어머니 평전인 『어미새의 노래』는 아직도 읽지 못했다. 눈물이 나와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다고 했다. 못내 안타까운 것이 어머니와 오래 있어주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 자정에 귀가하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진했던 사랑을 사회에 모두 쏟는 것이 그의 남은 꿈이다.

j칵테일 >> ‘폭탄주 가끔, 피부과 도움 살짝 … 로맨스는 유학 시절 한 번’

이길여 총장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길(吉)’자를 무척 좋아한다. 이길여산부인과에서 길병원으로 키우면서도 ‘길’자를 내세웠다. ‘가천(嘉泉)’이란 아호 역시 ‘길’에서 유래했다. ‘가(嘉)’를 파자(破字)하면 ‘길(吉)’을 더한다(加)는 뜻이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유승국 박사가 지어줬다. 그는 또 매우 실용적인데, 영문 이름이 ‘Gil Ya’다. 들어보니 ‘Ya’가 ‘Yeo’나 ‘Yo’보다 실제 발음에 가깝더라는 것이다.

●나이에 비해 20~30년은 젊어 보입니다. 건강유지 비결은.

 “과거엔 하루 4시간 정도 잤지만, 요즘은 6~7시간 잡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야 해요. 매일 1시간 이상 걸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항상 웃으려 노력하죠.”

●피부가 좋고 주름살도 없는데 비법이라도. 현대의학의 도움은.

 “타고났어요. 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가끔 젊은 친구들과 폭탄주도 마셔요. 재작년에 피부과 교수가 보자고 했어. 골프를 즐기다 보니 얼굴에 기미가 끼었더라고. 도움을 조금 받았어요. 그런 정도예요.”

●골프 실력은. ‘싱글’에 상당한 장타라는 소문인데요.

 “지난해 ‘에이지 슈팅(Age Shooting: 나이와 같은 타수를 치는 것)’을 했죠. 장타는 무슨. 또래 남자들보다 좀 낫지. 요즘 ‘임팩트’가 잘 안 돼 거리가 예전만 못해요.”

●상징 색(色)이 있다던데.

 “인디언 핑크예요. 병원의 흰색과 회색이 싫었어요. 뭔가 생동감 있는 색을 찾아 이런저런 페인트를 칠하다 문득 바로 이거다 한 게 인디언 핑크죠. 따뜻하면서도 흙빛 질감이 있어 좋아요.”

●자신에게 ‘남자’란 무엇인가요.

 “미국 유학할 때 뉴욕에서 단 한 번 로맨스가 있었어요. 그뿐이에요. 이후에는 별로 생각이 들지도 않았어요. 그럴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저 일과 결혼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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