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출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가출(家出)과 출가(出家)는 글자 순서만 바뀌었지만 의미 차이는 크다. 출가는 몸과 마음을 기준으로 몇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몸은 가출해 절집에 있지만 마음은 속세에 있는 경우다. 마음은 권력·재물·명예 또는 이성(異性)에 가 있다. 불가의 온갖 잡음의 원산지다. 둘째 몸은 속세에 있지만 마음은 출가한 재가출가(在家出家)다. 비록 처자와 속세에 살지만 마음은 도(道)를 추구한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세상에 살아도 세상과 어긋나고/집에 있어도 출가한 것 같네(處世同違世/居家似出家)”란 시가 있다. 셋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출가한 경우로 출가구도(出家求道), 또는 출가입도(出家入道)다. 역사상 유명한 출가는 많다. 신라 왕자 신분으로 출가해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모셔지는 김교각(金喬覺)이나 고려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그렇다.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의 한 풍경이다.

 그러나 유학 국가 조선에서 유학자의 출가는 큰 논란거리였다. 평생 방외거사(方外居士)였던 김시습(金時習)은 설잠(雪岑)이란 법명을 가졌으나 수양대군의 찬탈에 대한 저항으로 읽혀 크게 비판받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달랐다. 이이는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의암(義庵)이란 법명을 가졌다. 그의 출가에 대해 『명종실록』 사관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첩에게 시달려 출귀(出歸)해 산사를 전전하다 오랜 후에 돌아왔다”(『명종실록』 19년 8월 30일)고 전한다. 쉽진 않았겠지만 이이가 출가 경험을 살려 성리학과 불교의 공존을 추구했다면 조선 후기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성리학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보우(普雨)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독실한 불자였던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요승 보우를 논하는 상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렸고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맞아 죽는다.

 명나라의 이지(李贄 : 1527~1602)는 국자감 박사 출신의 유학자였으나 만 61세 때인 명 만력(萬曆) 16년(1588)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처럼 늦은 출가를 반로출가(半路出家)라고 한다. 이지는 남존여비 사상을 비판하면서 여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등 봉건 지배사상에 저항하다가 만력 30년(1602) ‘사설(邪說)로 대중을 미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자 옥중에서 자결한다. 『분서(焚書)』의 저자다운 죽음이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던 시대의 슬픈 출가도(出家圖)들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