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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레이디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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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대통령의 부인 ‘퍼스트 레이디’라는 자리를 하나의 직업으로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독특한 직업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 헌법에 할 일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퍼스트 레이디의 직분을 규정해 놓은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아무 일을 안 해도 된다. 반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무제한 선택의 자유 속에서 퍼스트 레이디는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선다. 사적인 경험 또는 개성이 묻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3일 흑인 학생들이 많은 워싱턴DC의 앨리스 딜 중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미셸이 퍼스트 레이디가 된 후 곧바로 시작한 아동비만 퇴치캠페인 ‘Let’s Move’의 일환이다. 흑인 미셸은 어려서부터 값싼 정크 푸드에 찌들고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로 뚱뚱해져 버린 동료들을 많이 봐왔을 게 틀림없다. 그 경험이 퍼스트 레이디가 된 후 이것만은 내가 나서서 꼭 고쳐 놓아야겠다고 마음 먹게 했을 것이다. 미셸은 어린이들과 함께 백악관 정원 한 모퉁이에 텃밭을 일궜다. 그들에게 여기서 나온 싱싱한 채소를 건넸다. 학교 내 급식과 자판기에선 정크 푸드를 몰아냈다. 자전거 타기와 라켓볼 운동을 권장하며 학교 대항 체육대회까지 만들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의 경우도 비슷하다. 초등학교 선생님과 도서관 사서 경험이 있는 로라는 퍼스트 레이디 재직 8년 동안 아이들 책 많이 읽히기에 ‘올인’했다. 미 전역을 돌며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소중함을 전파했다. 2001년 9·11 테러 소식도 의회를 방문해 의원들에게 ‘전미 책 축제’ 개최와 관련한 협조를 요청하다 들었을 정도였다.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경험이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미셸은 지난달 또 다른 일을 성대하게 시작했다. ‘군인 가족 돕기’ 캠페인이다. 미셸은 “전쟁터에 남편·아들을 보낸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불완전한 삶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의 부인인 ‘세컨드 레이디’ 질 바이든도 거들었다. “2008년 이라크 전장으로 떠난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가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 아들이 귀국하자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고 했다. 미셸이 군인 가족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새로운 미션에 도전한 것은 2개의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시의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우리의 퍼스트 레이디들도 많은 일을 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서 결식 아동 없애기, 그리고 한식 세계화까지. 대통령이 미처 살피기 어려운 곳을 찾아,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빠른 성과를 끌어낼 수 있는 점은 퍼스트 레이디의 특권이다. 이 특권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 또 우리 사회가 지금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문제에 다가가 있는지 퍼스트 레이디는 늘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제한의 자유는 무제한의 책임이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