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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⑩ 스타 탄생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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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배우전문학원에 등록했을 때 수업료를 빌려준 형 강신구 공군 대령(왼쪽). [중앙포토]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면 화낼 것이 아니라 와신상담해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내 신념을 굳게 한 사건이랄까. 충무로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 손시향의 태도는 내게 충격이었다. 그는 “오랜만이야” 하고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버렸다. 보디 가드로 보이는 2명을 거느린 그는 보통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었다. 난 벼락을 맞은 듯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순간적으로 나와 손시향의 처지가 비교됐다. 고등학교 같은 반에 대구에서 똑같이 집안이 망해서 상경했는데…. 당시 내 옷차림은 아주 남루했으리라. 반면 손시향은 미도파 백화점의 지하 클럽에 고정 출연할 정도로 잘 나가는 가수였다. 손시향과의 조우는 그의 히트곡 ‘검은 장갑’의 가사처럼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하며 내미는 손”이었다. 손시향은 대단한 저음으로 감동을 주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내가 그 자리에서 했던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그래, 너 노래 잘 한다. 하지만 난 너보다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다. 두고 보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정신이 나간 채 충무로 3가 중부 경찰서 쪽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발걸음은 새문안교회를 등지고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린 곳에서 눈을 들었다. 오른쪽을 보니 ‘한국배우전문학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둔 건 아니었지만 뭔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묘한 힘에 이끌려 1층 문을 열었다. 나이가 좀 든 여성이 카운터를 맡고 있었다. 난 그 부인에게 물었다.

 “입학할 수 있습니까?”

 그 부인은 굳이 뜨내기 손님을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이번 학기는 학생을 다 뽑았어요. 다음 학기에 등록하세요.”

 혹시 입학이 된다 해도 등록금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등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구원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젊은이, 여기 들어오고 싶어?”

 1층 사무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원 원장인 김인걸씨였다. 나는 절실하게 답했다.

 “네.”

 “그럼 내일부터 나와요.”

 김인걸씨가 첫 눈에 나를 괜찮게 본 것이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나는 한 달 늦게 연기반에 합류했다. 정말 행운이었다. 그 곳은 영화계의 핵심인 김기영·유현목·김수용 감독, 연극계의 중진인 박진·이진순·양광남 연출가 등을 강사진으로 보유한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학원이었다. 그 분들을 사사하고, 양광남씨에게 스타니슬랍스키의 책 『배우수업』으로 연기를 배웠다. 수업료는 공군에 입대한 형님에게 빌렸다.

 학원과 연계된 영화에 엑스트라로 동원되기도 했다. 촬영 카메라가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다방 손님의 하나 쯤으로 잡으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주인공 할 사람인데 여기 앉아서 단역이나 할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나중에 엑스트라나 하던 녀석이라고 손가락질 받기가 싫었다.

 1959년 8월,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사인 신필름이 젊은 전속 연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 신상옥 감독과 여배우 최은희가 있는 그 곳! 나는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원서를 넣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디션 당일, 현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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